“꺽, 끄억, 살려… 주세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혜윤은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종료 버튼을 누르면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질 것같이 현실감이 없었다.
“말하라고 했을 때 말하면 좋았잖아.”
괴로운 신음 사이로 말소리가 들렸다. 창고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멍하니 폭력을 바라보던 혜윤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이렇게 될 거란 걸 알았을 텐데, 용기가 가상하다고 해야 하나?”
소리를 따라간 시선 속에 한 남자가 보였다.
“하필 건드려도 유태선 그 또라이 걸 건드렸어.”
남자는 혀를 찼다.
“이대로 후회 안 하겠어?”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남자는 쾨쾨한 창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반듯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게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을 거 아니야.”
혜윤의 눈동자가 낮고 서늘한 목소리를 따라 조명이 드리워진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묘하게 지루해 보이는 표정에서 혜윤은 두려움을 느꼈다.
저 사람 다음에는 혜윤이었다. 순서가 그랬다. 혜윤이 여태까지 괜찮을 수 있는 이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먼저 잡혀 왔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온몸이 후들거렸다.
혜윤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바지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나자 남자가 고개를 움직였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금세 시선을 거두었지만 혜윤의 심장은 두려움에 쿵쿵 요동쳤다.
모두가 찬열이 벌인 짓이었다.
‘금방 올게. 일만 잘 끝나면 우리 떵떵거리며 살자.’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출장을 간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했다. 집을 나서면서 손을 한참 만지작거리던 찬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라도 지나치지 말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야 했다.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난 혜윤이 몸을 늘어트렸다.
“이제 우리 사이에 더 할 말은 없지?”
남자는 쓰러진 사람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네.”
남자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혜윤이 경악스러운 얼굴을 했다.
남자의 손을 따라간 시선에 날카로운 칼이 자리했다. 남자는 습관처럼 작은 손잡이를 몇 번 움켜쥐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남자의 손에 쥔 칼을 보자 몸부림을 치며 남자의 반대쪽으로 기어갔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며 혜윤의 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동정심을 느꼈다.
연민이 가득한 혜윤과는 달리 칼을 든 남자는 애처로운 몸부림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혜윤은 남자의 표정에서 두려움을 넘어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알아요. 말할게요. 제가 말하겠습니다. 제발 살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망설임 없이 사람을 찔렀다. 혜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칼에 찔린 사람의 몸에서 엄청난 기세로 피가 쏟아졌다. 혜윤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피를 보며 그제야 왜 창고에 비닐이 깔려 있었는지 깨달았다.
남자는 뺨에 튄 핏방울을 더럽다는 듯 거칠게 닦아냈다.
혜윤은 두려움을 넘은 공포감에도 남자의 행동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리면 칼끝이 자신에게로 향할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총보다는 이게 편해.”
누군가 남자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남자는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칼날에 묻은 피를 여상하게 닦으며 웃었다. 남자의 주변 사람들도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혜윤은 혼란과 공포에 온몸을 벌벌 떨었다.
“아악!”
누군가 뒤에서 혜윤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라는 생각이 들자 몸속의 모든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흑, 싫어요. 제발요. 살려 주세요.”
너무 무서워 입 밖으로 아무 말이나 튀어나왔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자꾸만 꼬꾸라졌다.
남자의 발 앞까지 질질 끌려온 혜윤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일어나.”
혜윤은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뭐 하자는 거야?”
두려움에 마비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자 남자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혜윤을 향해 물었다.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자꾸만 팔이 꺾여 몸을 들지 못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는 남자에 혜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장난해?”
남자가 혜윤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아, 아니요. 힘이, 힘이 안 들어가서….”
“아아, 힘이 안 들어가.”
남자가 한 손으로 혜윤의 뒷덜미를 잡아 몸을 들어 올렸다. 힘에 의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진 상체가 이윽고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힘이 빠진 몸이 저항 없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흐윽.”
혜윤이 일어나려 팔에 힘을 주었지만 남자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다시 한번 상체가 들린 혜윤이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져 그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았다.
“윽!”
상체만 들어 올려진 아주 낮은 높이였지만 공포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바닥에 딱 붙어 바들바들 떠는 몸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다시 한번 혜윤의 상체를 들어 올렸다.
“이제 일어나고 싶지 않아?”
혜윤의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대로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턱이 바닥에 부딪히며 쾅 소리를 냈다.
“흐으….”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뜬 혜윤은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몸에 힘을 주었다.
“일어, 일어날게요.”
남자는 혜윤의 목소리를 듣고 목덜미를 잡은 손을 놓았다. 혜윤은 안간힘을 쓰며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봐. 잘 일어날 수 있잖아.”
남자는 몸을 반쯤 일으킨 혜윤을 보며 말했다. 혜윤이 비틀비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울어? 우리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래. 너도 아무것도 모르겠지.”
남자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마치 안다는 듯이.
혜윤은 잘게 떨리는 손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정말이에요. 뭘 훔쳤는지도 몰라요. 진짜. 흐윽. 믿어 주세요.”
쏟아져 내리는 조명 아래로 혜윤의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의 눈동자가 우는 혜윤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혜윤이 축축한 흐느낌을 내뱉으며 고개를 바닥으로 내리려고 하자 남자가 급하게 머리채를 잡았다. 혜윤의 턱이 강제로 들어 올려지며 불빛에 얼굴이 전부 드러났다.
혜윤의 얼굴을 살피는 남자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초식동물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이는 눈빛이었다.
“…멍청하게 생겼네.”
혜윤은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눈이 마주치면 당장이라도 칼로 찌를 것 같았다. 혜윤의 두려움이 눈꼬리 옆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기민하게 혜윤의 얼굴을 살피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여자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아도 막상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맴돌았다.
혜윤은 이 침묵을 견뎌내지 못했다. 아주 잠깐 눈을 떴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고 눈에서 마르지 않은 눈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살려… 주세요.”
숨이 넘어가듯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혜윤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출장 간다고 했어요. 믿어 주세요.”
혜윤이 잘게 떨리는 손을 모아 비비며 애원했다.
“모르는 건 죄지. 혜윤아.”
남자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며 이를 드러냈다. 번뜩이는 눈과 어울리지 않은 입꼬리에 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물건이 떨어진 것 같은 큰 파열음이었다. 혜윤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물건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얘기하는 거 안 보여?”
생기를 잃어버린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남자는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듯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했다. 혜윤은 끌려가는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모든 게 익숙해 보이는 남자의 태도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숨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 가쁜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남자는 넋이 나간 혜윤의 뺨을 손가락 두 개로 툭 쳤다.
“이혜윤, 나 봐야지.”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말 잘 들어야 봐주지. 응?”
남자는 넋이 나간 혜윤을 달래듯 속삭였다. 남자의 말을 들은 혜윤의 눈동자에 초점이 빠르게 돌아왔다. 귓가에 속삭여진 단 하나의 희망에 혜윤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시키는 건 다 할게요. 정말 아무거나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살려만 주세요.”
“시키는 건 다 한다고?”
“네! 네! 그렇게 할게요.”
다급한 혜윤의 목소리에 남자가 먹이를 던져 주듯 관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우는 거 싫어해.”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혜윤은 울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남자는 그 모습이 웃긴지 킬킬거리고 웃었다. 두려움에 떠는 혜윤의 흉곽이 오르내리는 광경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저 시키는 거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울음 섞인 애원에 남자가 피식 웃으며 혜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시키는 거 다 한다면서, 울지 말라는데 왜 우는데?”
식은땀까지 흘리며 울음에 헐떡이는 혜윤에게 남자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죄송, 죄송해요. 아, 아, 안 울, 안 울게요. 제발 살려 주세요.”
혜윤이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두려움에 눈물이 터지자 남자가 혀를 끌끌 찼다.
좁아진 미간으로 혜윤을 구경하듯 쳐다보던 남자는 손바닥으로 흐르는 눈물을 투박하게 닦아내었다.
남자에게 살려 달라고 하는 이들은 많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살려 달라 애원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어올랐는데,
혜윤의 애원은 구미가 당겼다. 남자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먹잇감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다 할게요. 다요. 아무거나 다 할게요.”
남자는 무조건 다 하겠다는 혜윤을 보며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내가 좆이라도 빨라고 하면 어쩔래?”
혜윤이 잠깐 멈칫하며 입을 뻐끔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눈앞에 드리워진 죽음과 남자의 좆을 빠는 것은 비교할 거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또 뭐 할 수 있는데?”
남자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물었다.
“그리고 또 뭐 할 수 있는데?”
“…….”
남자는 혜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
“다요. 다 할 수 있어요.”
남자는 혜윤의 비장한 목소리에 칭찬을 하듯 이마를 톡톡 두드리더니 혜윤의 코앞에서 몸을 세웠다.
“그럼 빨아 볼래?”
혜윤이 일어선 남자를 따라 고개를 드니 남자의 고간에 닿았다.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막상 남자의 고간이 눈앞에 오자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뛰어댔다. 가만히 쳐다보면 몸이 들썩이는 게 눈이 보일 정도였다. 심하게 몸을 떨던 혜윤은 마음을 먹은 듯 손을 남자의 벨트로 가져갔다.
“큭.”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공사장 안에 남은 인원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몇 안 남은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밖으로 나갔다. 발소리에 놀란 혜윤이 급하게 손을 내리자 남자가 혜윤을 삐딱하게 내려다봤다.
“안 할 거야?”
남자는 혜윤의 무릎을 구두코로 툭툭 쳤다. 혜윤이 다시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가 봐주지 않겠다고 할까 덜컥 겁이 났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남자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밖으로 꺼내진 성기가 묵직했다. 혜윤의 두 손이 성기를 쥐자 미세한 떨림이 남자에게도 느껴졌다.
남자는 혜윤의 손이 자신의 기둥을 완벽하게 쥘 때까지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에 다 쥐어지지 않는 크기에 혜윤이 잠시 망설였다. 남자는 그 찰나의 망설임조차 전부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제 와서 하기 싫어?”
혜윤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주춤주춤 고개를 내려 입을 벌리고 귀두를 입에 담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입 안에 귀두를 밀어 넣자 남자는 그제야 만족한 듯 혜윤의 머리를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느리게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마에 느껴지는 손길에 혜윤이 눈동자를 위로 올리자 혜윤을 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움찔 몸을 떤 혜윤은 남자의 성기를 조금 더 삼켜냈다. 남자의 진득한 시선을 피해 내리깐 시야에 하얀 와이셔츠가 걸렸다. 혜윤은 와이셔츠 밑단에 눈을 고정하고 성기를 목 안으로 더 밀어 넣었다.
목구멍 끝에 남자의 귀두가 닿았지만 아직 입 밖으로 기둥이 남아 있었다.
“끝까지 넣어야지.”
남자의 손이 혜윤의 뒤통수를 감싸며 지그시 누르자 뭉툭한 귀두가 목구멍을 막았다.
“컥, 욱.”
숨구멍을 막는 귀두에 반사적으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혜윤은 몸을 움츠렸다. 혜윤이 멈추자 남자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남자의 힘에 고개가 속절없이 밀려 내려갔다.
욱, 추릅, 춥.
성인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가 울렸다. 깊숙이 밀려 들어온 성기가 혜윤의 숨구멍을 막았다. 숨을 쉬기 위해 흉곽을 키울 때마다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음….”
남자가 숨소리를 뱉어내자 혜윤이 반사적으로 눈을 올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조명에 그늘진 남자의 각진 턱과 입술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질끔 감고 남자가 혜윤의 고개를 누르는 대로 그저 가만히 있었다.
“제대로 안 할 거야? 반도 안 넣었잖아.”
숨이 막혀 괴로운 혜윤에게 남자가 말했다. 혜윤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남자가 기가 찬다는 듯 손에서 힘을 풀자 혜윤이 성기를 뱉어내며 마른기침을 했다.
남자는 콜록콜록 몸까지 흔들며 기침을 하는 혜윤을 내려다보았다. 혜윤이 조금 진정되자 남자는 큰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혜윤의 고개가 위로 들어 올려졌다. 갑작스러운 아픔에 겁에 질린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혀를 찼다. 세게 잡지도 않았는데 엄살을 부리는 게 같잖았다.
“목구멍 더 열고.”
남자는 두꺼운 손으로 혜윤의 턱을 잡아 벌렸다. 굵고 긴 손가락이 입 안으로 침범했다. 손가락이 목구멍 안쪽을 헤집었다. 입 안을 탐방하듯 손가락 끝으로 힘을 주며 입 안의 살들을 꾹꾹 눌러댔다.
“더 집어넣을 수 있잖아.”
남자는 혜윤의 엄살을 타박하며 벌어진 입 안으로 손가락을 더 깊게 집어넣었다. 손등이 앞니에 닿을 만큼 밀어 넣어진 탓에 혜윤이 마른기침을 뱉어냈다.
콜록콜록.
혜윤의 기침에 남자가 손가락을 빼내었다. 기침이 진정되자 혀를 집어 길게 빼냈다.
“이 세우지 말고. 힘들면 내가 도와줘?”
욕심을 가득 실은 손가락에 혜윤은 새하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마주한 남자의 두 눈에서 은은한 광기가 보였다.
욕망을 담아낸 흉흉한 두 눈을 거두고 남자는 기회를 준다는 듯 관대한 얼굴을 했다. 남자의 손등이 혜윤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그럼. 입 벌려.”
혜윤은 아까보다 더 깊숙이 넣어진 성기에 헛구역질이 났지만 꾹 참아냈다.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에 턱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남자는 정도를 모르고 더 깊숙이 들어오려고 했다. 혜윤은 주먹을 꽉 쥐며 바들바들 떨었다. 남자는 혜윤이 한계라고 생각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고 몸을 뒤로 물렸다. 숨이 모자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명 아래 비치는 혜윤의 빨간 귀 끝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려 귀 끝을 손가락으로 쓰다었듬다. 배 속 깊숙이 끓어오르는 만족감에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남자의 눈은 여전히 혜윤에게 고정되었다. 자신 때문에 엉망이 된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봐, 잘할 수 있었으면서 엄살은.”
남자는 괴로움을 엄살이라 말했다. 입 안에 맴도는 비릿한 맛이 혜윤의 현실을 일깨웠다.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되는 이유는 남자의 음성이 처음보다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숨을 몰아쉬는 혜윤의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눈앞에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성기가 보였다. 핏줄까지 불거진 두툼한 성기가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다.
남자는 혜윤의 턱을 아프지 않게 잡아 올렸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머리가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생각을 멈추었다. 시야에 남자의 짙은 눈썹과 곧은 콧대가 담겼다.
얼굴을 또렷하게 담아내기 전에 혜윤은 들어 올려졌다.
“어?”
놀라 뱉어낸 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혜윤의 몸이 팔레트 위로 올려졌다. 혜윤이 남자를 저지할 틈도 없이 바지와 속옷이 끌어 내려졌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한기에 다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뜨거운 손바닥이 혜윤의 허벅지를 쓸어올렸다. 손바닥이 지나간 자리가 뜨끈했다. 남자가 다리 사이에 제 몸을 껴 넣었다. 벌려진 양다리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허리에 혜윤이 긴장한 듯 몸을 굳혔다.
“아!”
젖지 않은 뻑뻑한 구멍에 귀두를 맞춘 남자가 허리를 밀어 넣자 혜윤이 아픈 소리를 내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막무가내로 혜윤의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혜윤의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픔을 참아 보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씨발.”
남자는 혜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조급해 보이던 남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작은 구멍 앞에서 멈춰 섰다.
“네가 해.”
남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혜윤이 눈을 굴리자 남자가 혜윤의 손을 거칠게 잡아 아래로 가져다 댔다.
“네가 하라고.”
잡힌 손을 빼내지도 못하고 요구처럼 만지지도 못한 채 눈을 굴리자 남자가 손가락 하나를 펴 클리토리스에 내려놓았다. 당황스러운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해 봤을 거 아니야. 하라고.”
남자는 당황스럽고 난처한 요구를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피 볼래?”
코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혜윤이 마른입만 다시자 입구에 닿아 있던 검붉은 성기가 재촉하듯 꺼덕거리며 음부를 비벼댔다.
혜윤은 이 순간의 자신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혜윤의 손가락이 클리토리스를 어설프게 비비기 시작했다. 마른 손이 갑자기 비벼오자 따갑기만 할 뿐이었다.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제 입 속에 혜윤의 손가락을 넣었다. 단단하고 뜨거운 혀가 손끝에 닿았다. 혀는 유영하듯 혜윤의 손가락을 한참 동안이나 핥아댔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손끝에서 새어 나왔다.
만족스러울 만큼 혜윤의 손가락을 빨아댄 남자가 친절하게도 클리토리스 위에 타액으로 젖은 손가락을 내려놓았다.
“비벼.”
원초적인 요구에 혜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 클리토리스를 비비기 시작했다. 젖은 손가락으로 움직이니 아까보다 조금은 부드러운 움직임이 되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어설프게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는 혜윤을 남자가 빤히 내려다보았다. 핏줄이 불거지고 한계까지 커진 자신의 성기를 큰 손으로 한번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쿠퍼액이 묻어났다.
남자가 혜윤의 입구를 뭉툭한 손끝으로 지분거리다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한 마디가 채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뻑뻑하기만 했다.
남자가 초조하다는 듯 울컥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억지로 들어갈까, 남자의 마음에 갈등이 일었지만 제 클리토리스를 열심히 비비고 있는 혜윤을 내려다보며 이 광경을 조금 더 즐겨보자고 마음먹었다.
남자는 한 손으로 혜윤의 갈라진 곳을 벌리며 다른 손의 엄지손가락을 혜윤의 입 안에 넣었다.
“빨아.”
혜윤은 입을 동그랗게 모아 남자의 손가락을 빨았다. 손가락을 입에서 빼낸 남자는 타액이 묻은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지그시 눌러 비볐다.
“헉….”
남자의 갑작스러운 손길에 혜윤이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들썩였다. 남자의 손길은 오로지 혜윤의 흥분이 목적이었다.
목적이 다분한 손길이 어루만지자 작은 입구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남자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이는 구멍에 검지를 밀어 넣었다. 남자는 초조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입구 안을 꾹꾹 눌러가며 클리토리스를 자극하자 손가락 끝에 축축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배꼽 위까지 바짝 선 성기를 큰 손으로 몇 번 쓸어낸 후 귀두를 비벼 밀어 넣었다. 아직은 다 풀리지 않은 입구에서 귀두가 빗겨 나왔지만 남자는 제 성기를 잡고 다시 입구를 지그시 눌렀다.
“아흑.”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길 원할수록 혜윤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남자의 성기가 몸속의 장기를 밀어내는 것같이 느껴졌다. 혜윤은 자신을 짓누르는 몸을 무의식적으로 밀어보려 했지만 밀리지 않았다.
남자는 점점 깊숙이 안으로 들어왔다. 꽉 물어오는 입구에 허리를 밀었다가 멈추고 다시 조금 빼내고 다시 더 깊게 넣으며 성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자신을 밀어내는 혜윤의 손목을 잡아 내리고 혜윤이 도망갈 수 없게 골반을 더 깊이 눌렀다.
남자의 성기가 안으로 전부 들어왔다. 배 안 가득 느껴지는 남자의 성기에 혜윤은 버거운 듯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는 틈을 주지 않고 허리를 처박았다.
“으, 읏, 흣.”
남자가 치받을 때마다 혜윤이 숨이 막힌 소리를 뱉어냈다.
멈추지 않는 추삽질에 온몸이 흔들렸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혜윤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겨 게걸스럽게 허릿짓을 했다.
“윽, 하윽.”
퍽퍽 살 부딪치는 소리와 숨소리만 섞여들었다. 남자가 혜윤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안에 다 차지도 않은 가슴을 주무르다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단추를 뜯어내고 속살을 훤히 드러내 보였다.
남자가 바짝 선 유두를 빨자 혜윤이 몸을 움찔거렸다. 욕심 가득 가슴을 물고 빨아대며 손으로는 반대편의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지분댔다.
혜윤이 남자의 손길에 반응하며 움직이자 남자는 더 집요해지고 더 거칠어졌다.
“하윽, 흣, 아으.”
혜윤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 남자의 모습이 가득 들어찼다.
“눈 감지 마.”
남자는 허릿짓을 하며 혜윤의 눈을 보았다. 두 눈이 마주하자 남자는 곧장 고개를 내려 혜윤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남자와의 키스는 섹스와 똑같았다. 두꺼운 혀를 쑤셔 넣고 입 안을 헤집어 혜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혀뿌리를 뽑아 들 듯 휘감았다가 혀끝을 쪽쪽 빨아댔다. 혜윤의 혀끝을 핥고 입천장을 간지럽히며 추삽질을 이어갔다.
극으로 치닫는 혜윤의 허벅지가 발발 떨려왔다. 남자는 잡고 있던 골반을 놓고 혜윤의 허벅지를 더 크게 벌려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왔다.
한 번도 닿지 않았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성기에 혜윤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입이 벌어졌다.
남자는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흥분에 몸부림치는 혜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혜윤의 발가락이 곱아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며 눈에 빛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으윽….”
목 안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리를 뒤틀며 엉덩이에 힘을 주자 남자는 골반을 잡고 빠르게 허릿짓을 했다. 눈앞에 봉긋 솟은 가슴을 게걸스럽게 빨아대며 치받을 때마다 혜윤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으, 아으, 흣.”
혜윤이 온몸에 힘을 주며 남자에게 매달려 왔다. 이에 응답하듯 남자는 턱 근육이 튀어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며 허릿짓을 했다. 공사장 안에 퍽퍽 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하으으….”
긴 신음과 함께 혜윤의 몸에서 힘이 풀렸지만 남자의 거친 허릿짓은 멈추지 않았다. 하얀 몸에 손자국이 찍힐 정도로 힘을 준 남자가 허리를 말아 혜윤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숨을 내뱉었다. 혜윤의 안에서 남자의 흔적들이 새어 나왔다.
두 숨소리가 짧게 엉켰다 떨어졌다. 남자가 몸에서 나오자 상실감에 혜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자는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자신의 옷을 정리하고 혜윤을 쳐다보았다.
“옷은 못 입겠네.”
자신이 찢어 버린 혜윤의 셔츠와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쩔 수 없지, 뭐.”
남자는 혼자 결론을 내고 자신의 검은 코트를 벗어 혜윤을 여몄다. 마치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겠다는 듯 혜윤을 폭 감싸고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남자가 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서 뒷짐을 서고 있던 부하들이 짧게 묵례했다. 고개를 든 사내들이 일제히 남자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린 것을 쳐다보자 남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눈깔 안 돌리냐?”
심기가 불편한 음성에 모두가 황급히 눈을 바닥으로 깔았다. 남자는 그제야 만족한 듯 누군가를 불렀다.
“황 실장.”
“네. 대표님.”
“차 안 가져오고 뭐 해?”
당황함에 넋을 놓고 있던 황 실장이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황 실장은 차 쪽으로 뛰어가며 남자에게 매달려 있는 여자의 얼굴을 힐끔거렸지만 꽁꽁 싸인 여자의 모습을 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
“다시 한번 말해 봐.”
칠이 다 벗겨진 허름한 대문 앞에 두 부녀가 서 있었다. 중년의 남자와 남자의 어깨보다 조금 더 큰 여자아이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가 불만스럽다는 듯 얼굴을 불퉁거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걸 왜 해야 하는데?”
중년의 남자의 것과 엇비슷하게 생긴 눈썹은 펴질 줄 모르고 점점 찌푸려져 코에 주름이 생겼다.
“빨리, 어? 안 해?”
아버지가 얼굴을 험상궂게 굳히자 아이가 금세 기가 죽어 어깨를 늘어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저 병 있어요.”
“또.”
“…옮아요.”
아버지가 계속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자 아이가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피, 침, 땀 모두 다요.”
아이가 말을 마치고는 아버지에게 눈을 흘겼다. 아버지는 아이가 눈을 흘기든 말든 안심이 되었다는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원장선생님한테 꼭 그 얘기 해야 해.”
“왜 얘기해야 하는데! 나 병도 없는데!”
혜윤이 아버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한 얼굴을 삐죽거리며 금방이라도 대문을 차 버릴 듯 씩씩대었다. 하지만 꼬질꼬질한 운동화는 대문 한 번을 차 보지 못하고 흙바닥만 긁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성질은 지 엄마 닮아 가지고.”
아버지가 혜윤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아프게 문질렀다. 볼을 한번 꼬집어 늘리고는 어깨 위에 걸려 있는 가방을 혜윤에게 건넸다.
가방의 지퍼를 열어 약이 가득 든 비닐 팩을 보여 주었다.
“아침, 점심, 저녁 꼬박꼬박 먹어. 보여 줘야 더 믿지.”
“…….”
혜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약봉지를 거칠게 뺏어 가방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그냥 영양제야. 먹으면 몸에 좋아.”
“몸에 좋은 거 누가 몰라?”
달래듯 가벼운 농담을 건넨 아버지를 노려보며 혜윤이 씩씩댔다.
“정말 일주일 있다가 올 거야. 이번엔 진짜야.”
아버지가 말을 꺼내자 혜윤이 땅바닥을 쳐다보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바닥을 쳐다보는 눈에 물기가 어렸다.
“거기 안 가면 안 돼?”
혜윤이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런 말 하지 말랬지.”
아버지는 작은 물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혜윤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며 흙바닥을 적셨다.
“일주일 뒤에 올게. 진짜야! 저번처럼 늦지 않을게.”
훌쩍이는 혜윤의 얼굴 밑으로 아버지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혜윤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자 아버지는 다정하게 웃으며 눈물 젖은 혜윤의 눈을 닦아 주었다.
“너는 눈은 엄마를 닮아서 아빠가….”
아버지는 뒷말을 삼켰다. 아버지의 씁쓸한 눈빛에 혜윤이 입 안 살을 깨물었다.
“돈 많이 따서 우리 혜윤이 선물 큰 거 사 가지고 올게!”
아버지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혜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어두운 얼굴을 했다.
“선물 안 가져와도 돼.”
“왜애! 아빠가 돈 많이 따서….”
“됐다고! 시간 맞춰서 오기나 해!”
혜윤이 큰 소리를 내며 아버지의 새끼손가락에 억지로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쉽게 내쳐질 약속이라는 것을 앎에도 혜윤이 믿을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혜윤의 새끼손가락을 힘주어 걸며 웃었다.
“진짜 일주일 뒤에 온다니까, 아빠가 딸 두고 어디 가! 아빠가 이러는 게 다 좋은 집에서 살게 해 주려고 그러는 건데.”
“집 안 좋아도 돼. 진짜야.”
우물거리며 말을 내뱉는 혜윤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눌렀다. 혜윤의 입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다.
“너는 진짜 엄마랑 똑같다. 혜윤아.”
아버지가 혜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버지는 혜윤의 손을 잡고 낡은 대문을 열었다. 끼익거리며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혜윤이 다른 한 손으로 제 귀를 막았다.
“아주 신파 났네.”
대문 옆 샛길에 삐딱하게 선 소년이 안으로 들어가는 부녀를 보았다. 성인과 소년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소년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비웃음 뒤에 칭얼대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눈에 걸렸다.
맑은 하늘을 닮은 듯한 깨끗하고 순한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소년이 대문을 밀자 또다시 끼익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가자 혜윤의 뒷모습이 보였다.
베이지색 체크무늬 남방과 파란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모습일 뿐인데 걸어가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궁금하다는 듯 시설을 두리번대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소년이 자리에서 그대로 멈췄다. 굳게 닫힌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여자아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멍하게 지켜보던 소년이 누군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태석아! 아까 준비해 놓으라고 한 거 다 준비됐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돌린 태석이 손을 휘휘 젓자 뛰어오던 친구의 발걸음이 늦춰지고 종국에는 뒤로 돌아 자신이 있던 곳으로 뛰어갔다.
태석은 친구의 행동은 신경 쓰지 않은 채 혜윤이 들어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태석이 혜윤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아주 늦은 저녁이었다. 용역으로 불려가 성가신 일을 처리하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성가신 몸싸움을 한 끝에 입 안이 터졌다. 혀끝에 닿는 느낌이 쓰라렸다. 얼굴을 찌푸리며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한동안 입 안의 상처가 귀찮아지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복도의 끝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있어요.”
태석이 소리에 이끌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에요.”
작고 희미한 소리를 따라 불이 켜진 원장실 앞까지 다가간 태석이 작은 문틈 사이로 보이는 뒤통수에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옮아요.”
“뭐?”
원장의 사나운 기세에 혜윤이 몸을 움츠렸다.
“침이나 땀으로 옮아요. 피로도요.”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혜윤은 또박또박 말했다.
존나 불쌍하네.
태석은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덜덜 떠는 혜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혜윤이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원장에게 내밀었다.
“저 약도 먹어요. 진짜예요.”
혜윤의 말에 태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걸 진짜 하네.
짜증이 난 듯 불퉁한 얼굴로 아버지와 실랑이를 하던 혜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 씨발.”
통하지 않는 장난질이라고 생각했던 태석에게 원장이 신선한 반응을 보였다. 원장이 먹는 영양제의 개수를 떠올리며 의외로 먹히는 거짓말인가, 싶었다.
혜윤은 손을 덜덜 떨면서도 원장에게 펼친 손바닥을 접지 않았다.
원장이 너무나 쉽게 믿는 모양새에 태석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병신.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원장을 보며 태석이 그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쉬웠다.
“재수 없게 이런 년을….”
찰싹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던 혜윤의 뒤통수가 소파 밑으로 사라졌다. 태석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저 애가 버틸 수 있을까?
태석은 문득 잠깐 마주쳤던 여자아이의 눈을 떠올렸다. 태석이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 원장이 누구냐며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태석이 문을 열어 얼굴을 보이자 원장이 하얀 메리야스 차림으로 뚱뚱한 배를 크게 부풀리며 숨을 쉬고 있었다.
“뭐야.”
시근덕거리는 소리가 여자아이에게 향하는 것도 아닌데 여자아이는 불쌍하게 덜덜 몸을 떨었다. 찰나의 순간 태석의 눈동자가 덜덜 떠는 혜윤의 모습을 담았다.
태석은 순식간에 표정을 감추고 감흥 없는 눈으로 원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일은 잘 끝냈습니다. 내일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방에 불이 켜져 있어서.”
원장은 커다란 배를 오르내리며 흉악하게 숨을 내쉬다가 감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했다.”
허공을 가르던 손이 태석의 뺨을 기분 나쁘게 툭툭 쳤다. 태석은 익숙하게 묵묵히 손길을 받아냈다.
태석이 고개를 숙이자 원장은 태석을 비껴 먼저 원장실을 나섰다.
태석도 몸을 반쯤 일으키고 떠는 혜윤을 눈동자로 한번 훑고는 방 밖으로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