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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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le Le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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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 끄억, 살려… 주세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혜윤은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종료 버튼을 누르면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질 것같이 현실감이 없었다.

“말하라고 했을 때 말하면 좋았잖아.”

괴로운 신음 사이로 말소리가 들렸다. 창고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멍하니 폭력을 바라보던 혜윤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이렇게 될 거란 걸 알았을 텐데, 용기가 가상하다고 해야 하나?”

소리를 따라간 시선 속에 한 남자가 보였다.

“하필 건드려도 유태선 그 또라이 걸 건드렸어.”

남자는 혀를 찼다.

“이대로 후회 안 하겠어?”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남자는 쾨쾨한 창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반듯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게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을 거 아니야.”

혜윤의 눈동자가 낮고 서늘한 목소리를 따라 조명이 드리워진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묘하게 지루해 보이는 표정에서 혜윤은 두려움을 느꼈다.

저 사람 다음에는 혜윤이었다. 순서가 그랬다. 혜윤이 여태까지 괜찮을 수 있는 이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먼저 잡혀 왔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온몸이 후들거렸다.

혜윤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바지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나자 남자가 고개를 움직였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금세 시선을 거두었지만 혜윤의 심장은 두려움에 쿵쿵 요동쳤다.

모두가 찬열이 벌인 짓이었다.

‘금방 올게. 일만 잘 끝나면 우리 떵떵거리며 살자.’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출장을 간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했다. 집을 나서면서 손을 한참 만지작거리던 찬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라도 지나치지 말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야 했다.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난 혜윤이 몸을 늘어트렸다.

“이제 우리 사이에 더 할 말은 없지?”

남자는 쓰러진 사람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네.”

남자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혜윤이 경악스러운 얼굴을 했다.

남자의 손을 따라간 시선에 날카로운 칼이 자리했다. 남자는 습관처럼 작은 손잡이를 몇 번 움켜쥐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남자의 손에 쥔 칼을 보자 몸부림을 치며 남자의 반대쪽으로 기어갔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며 혜윤의 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동정심을 느꼈다.

연민이 가득한 혜윤과는 달리 칼을 든 남자는 애처로운 몸부림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혜윤은 남자의 표정에서 두려움을 넘어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알아요. 말할게요. 제가 말하겠습니다. 제발 살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망설임 없이 사람을 찔렀다. 혜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칼에 찔린 사람의 몸에서 엄청난 기세로 피가 쏟아졌다. 혜윤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피를 보며 그제야 왜 창고에 비닐이 깔려 있었는지 깨달았다.

남자는 뺨에 튄 핏방울을 더럽다는 듯 거칠게 닦아냈다.

혜윤은 두려움을 넘은 공포감에도 남자의 행동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리면 칼끝이 자신에게로 향할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총보다는 이게 편해.”

누군가 남자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남자는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칼날에 묻은 피를 여상하게 닦으며 웃었다. 남자의 주변 사람들도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혜윤은 혼란과 공포에 온몸을 벌벌 떨었다.

“아악!”

누군가 뒤에서 혜윤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라는 생각이 들자 몸속의 모든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흑, 싫어요. 제발요. 살려 주세요.”

너무 무서워 입 밖으로 아무 말이나 튀어나왔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자꾸만 꼬꾸라졌다.

남자의 발 앞까지 질질 끌려온 혜윤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일어나.”

혜윤은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뭐 하자는 거야?”

두려움에 마비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자 남자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혜윤을 향해 물었다.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자꾸만 팔이 꺾여 몸을 들지 못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는 남자에 혜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장난해?”

남자가 혜윤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아, 아니요. 힘이, 힘이 안 들어가서….”

“아아, 힘이 안 들어가.”

남자가 한 손으로 혜윤의 뒷덜미를 잡아 몸을 들어 올렸다. 힘에 의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진 상체가 이윽고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힘이 빠진 몸이 저항 없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흐윽.”

혜윤이 일어나려 팔에 힘을 주었지만 남자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다시 한번 상체가 들린 혜윤이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져 그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았다.

“윽!”

상체만 들어 올려진 아주 낮은 높이였지만 공포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바닥에 딱 붙어 바들바들 떠는 몸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다시 한번 혜윤의 상체를 들어 올렸다.

“이제 일어나고 싶지 않아?”

혜윤의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대로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턱이 바닥에 부딪히며 쾅 소리를 냈다.

“흐으….”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뜬 혜윤은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몸에 힘을 주었다.

“일어, 일어날게요.”

남자는 혜윤의 목소리를 듣고 목덜미를 잡은 손을 놓았다. 혜윤은 안간힘을 쓰며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봐. 잘 일어날 수 있잖아.”

남자는 몸을 반쯤 일으킨 혜윤을 보며 말했다. 혜윤이 비틀비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울어? 우리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래. 너도 아무것도 모르겠지.”

남자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마치 안다는 듯이.

혜윤은 잘게 떨리는 손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정말이에요. 뭘 훔쳤는지도 몰라요. 진짜. 흐윽. 믿어 주세요.”

쏟아져 내리는 조명 아래로 혜윤의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의 눈동자가 우는 혜윤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혜윤이 축축한 흐느낌을 내뱉으며 고개를 바닥으로 내리려고 하자 남자가 급하게 머리채를 잡았다. 혜윤의 턱이 강제로 들어 올려지며 불빛에 얼굴이 전부 드러났다.

혜윤의 얼굴을 살피는 남자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초식동물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이는 눈빛이었다.

“…멍청하게 생겼네.”

혜윤은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눈이 마주치면 당장이라도 칼로 찌를 것 같았다. 혜윤의 두려움이 눈꼬리 옆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기민하게 혜윤의 얼굴을 살피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여자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아도 막상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맴돌았다.

혜윤은 이 침묵을 견뎌내지 못했다. 아주 잠깐 눈을 떴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고 눈에서 마르지 않은 눈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살려… 주세요.”

숨이 넘어가듯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혜윤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출장 간다고 했어요. 믿어 주세요.”

혜윤이 잘게 떨리는 손을 모아 비비며 애원했다.

“모르는 건 죄지. 혜윤아.”

남자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며 이를 드러냈다. 번뜩이는 눈과 어울리지 않은 입꼬리에 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물건이 떨어진 것 같은 큰 파열음이었다. 혜윤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물건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얘기하는 거 안 보여?”

생기를 잃어버린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남자는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듯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했다. 혜윤은 끌려가는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모든 게 익숙해 보이는 남자의 태도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숨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 가쁜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남자는 넋이 나간 혜윤의 뺨을 손가락 두 개로 툭 쳤다.

“이혜윤, 나 봐야지.”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말 잘 들어야 봐주지. 응?”

남자는 넋이 나간 혜윤을 달래듯 속삭였다. 남자의 말을 들은 혜윤의 눈동자에 초점이 빠르게 돌아왔다. 귓가에 속삭여진 단 하나의 희망에 혜윤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시키는 건 다 할게요. 정말 아무거나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살려만 주세요.”

“시키는 건 다 한다고?”

“네! 네! 그렇게 할게요.”

다급한 혜윤의 목소리에 남자가 먹이를 던져 주듯 관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우는 거 싫어해.”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혜윤은 울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남자는 그 모습이 웃긴지 킬킬거리고 웃었다. 두려움에 떠는 혜윤의 흉곽이 오르내리는 광경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저 시키는 거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울음 섞인 애원에 남자가 피식 웃으며 혜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시키는 거 다 한다면서, 울지 말라는데 왜 우는데?”

식은땀까지 흘리며 울음에 헐떡이는 혜윤에게 남자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죄송, 죄송해요. 아, 아, 안 울, 안 울게요. 제발 살려 주세요.”

혜윤이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두려움에 눈물이 터지자 남자가 혀를 끌끌 찼다.

좁아진 미간으로 혜윤을 구경하듯 쳐다보던 남자는 손바닥으로 흐르는 눈물을 투박하게 닦아내었다.

남자에게 살려 달라고 하는 이들은 많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살려 달라 애원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어올랐는데,

혜윤의 애원은 구미가 당겼다. 남자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먹잇감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다 할게요. 다요. 아무거나 다 할게요.”

남자는 무조건 다 하겠다는 혜윤을 보며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내가 좆이라도 빨라고 하면 어쩔래?”

혜윤이 잠깐 멈칫하며 입을 뻐끔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눈앞에 드리워진 죽음과 남자의 좆을 빠는 것은 비교할 거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또 뭐 할 수 있는데?”

남자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물었다.

“그리고 또 뭐 할 수 있는데?”

“…….”

남자는 혜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

“다요. 다 할 수 있어요.”

남자는 혜윤의 비장한 목소리에 칭찬을 하듯 이마를 톡톡 두드리더니 혜윤의 코앞에서 몸을 세웠다.

“그럼 빨아 볼래?”

혜윤이 일어선 남자를 따라 고개를 드니 남자의 고간에 닿았다.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막상 남자의 고간이 눈앞에 오자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뛰어댔다. 가만히 쳐다보면 몸이 들썩이는 게 눈이 보일 정도였다. 심하게 몸을 떨던 혜윤은 마음을 먹은 듯 손을 남자의 벨트로 가져갔다.

“큭.”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공사장 안에 남은 인원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몇 안 남은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밖으로 나갔다. 발소리에 놀란 혜윤이 급하게 손을 내리자 남자가 혜윤을 삐딱하게 내려다봤다.

“안 할 거야?”

남자는 혜윤의 무릎을 구두코로 툭툭 쳤다. 혜윤이 다시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가 봐주지 않겠다고 할까 덜컥 겁이 났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남자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밖으로 꺼내진 성기가 묵직했다. 혜윤의 두 손이 성기를 쥐자 미세한 떨림이 남자에게도 느껴졌다.

남자는 혜윤의 손이 자신의 기둥을 완벽하게 쥘 때까지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에 다 쥐어지지 않는 크기에 혜윤이 잠시 망설였다. 남자는 그 찰나의 망설임조차 전부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제 와서 하기 싫어?”

혜윤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주춤주춤 고개를 내려 입을 벌리고 귀두를 입에 담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입 안에 귀두를 밀어 넣자 남자는 그제야 만족한 듯 혜윤의 머리를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느리게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마에 느껴지는 손길에 혜윤이 눈동자를 위로 올리자 혜윤을 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움찔 몸을 떤 혜윤은 남자의 성기를 조금 더 삼켜냈다. 남자의 진득한 시선을 피해 내리깐 시야에 하얀 와이셔츠가 걸렸다. 혜윤은 와이셔츠 밑단에 눈을 고정하고 성기를 목 안으로 더 밀어 넣었다.

목구멍 끝에 남자의 귀두가 닿았지만 아직 입 밖으로 기둥이 남아 있었다.

“끝까지 넣어야지.”

남자의 손이 혜윤의 뒤통수를 감싸며 지그시 누르자 뭉툭한 귀두가 목구멍을 막았다.

“컥, 욱.”

숨구멍을 막는 귀두에 반사적으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혜윤은 몸을 움츠렸다. 혜윤이 멈추자 남자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남자의 힘에 고개가 속절없이 밀려 내려갔다.

욱, 추릅, 춥.

성인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가 울렸다. 깊숙이 밀려 들어온 성기가 혜윤의 숨구멍을 막았다. 숨을 쉬기 위해 흉곽을 키울 때마다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음….”

남자가 숨소리를 뱉어내자 혜윤이 반사적으로 눈을 올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조명에 그늘진 남자의 각진 턱과 입술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질끔 감고 남자가 혜윤의 고개를 누르는 대로 그저 가만히 있었다.

“제대로 안 할 거야? 반도 안 넣었잖아.”

숨이 막혀 괴로운 혜윤에게 남자가 말했다. 혜윤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남자가 기가 찬다는 듯 손에서 힘을 풀자 혜윤이 성기를 뱉어내며 마른기침을 했다.

남자는 콜록콜록 몸까지 흔들며 기침을 하는 혜윤을 내려다보았다. 혜윤이 조금 진정되자 남자는 큰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혜윤의 고개가 위로 들어 올려졌다. 갑작스러운 아픔에 겁에 질린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혀를 찼다. 세게 잡지도 않았는데 엄살을 부리는 게 같잖았다.

“목구멍 더 열고.”

남자는 두꺼운 손으로 혜윤의 턱을 잡아 벌렸다. 굵고 긴 손가락이 입 안으로 침범했다. 손가락이 목구멍 안쪽을 헤집었다. 입 안을 탐방하듯 손가락 끝으로 힘을 주며 입 안의 살들을 꾹꾹 눌러댔다.

“더 집어넣을 수 있잖아.”

남자는 혜윤의 엄살을 타박하며 벌어진 입 안으로 손가락을 더 깊게 집어넣었다. 손등이 앞니에 닿을 만큼 밀어 넣어진 탓에 혜윤이 마른기침을 뱉어냈다.

콜록콜록.

혜윤의 기침에 남자가 손가락을 빼내었다. 기침이 진정되자 혀를 집어 길게 빼냈다.

“이 세우지 말고. 힘들면 내가 도와줘?”

욕심을 가득 실은 손가락에 혜윤은 새하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마주한 남자의 두 눈에서 은은한 광기가 보였다.

욕망을 담아낸 흉흉한 두 눈을 거두고 남자는 기회를 준다는 듯 관대한 얼굴을 했다. 남자의 손등이 혜윤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그럼. 입 벌려.”

혜윤은 아까보다 더 깊숙이 넣어진 성기에 헛구역질이 났지만 꾹 참아냈다.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에 턱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남자는 정도를 모르고 더 깊숙이 들어오려고 했다. 혜윤은 주먹을 꽉 쥐며 바들바들 떨었다. 남자는 혜윤이 한계라고 생각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고 몸을 뒤로 물렸다. 숨이 모자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명 아래 비치는 혜윤의 빨간 귀 끝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려 귀 끝을 손가락으로 쓰다었듬다. 배 속 깊숙이 끓어오르는 만족감에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남자의 눈은 여전히 혜윤에게 고정되었다. 자신 때문에 엉망이 된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봐, 잘할 수 있었으면서 엄살은.”

남자는 괴로움을 엄살이라 말했다. 입 안에 맴도는 비릿한 맛이 혜윤의 현실을 일깨웠다.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되는 이유는 남자의 음성이 처음보다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숨을 몰아쉬는 혜윤의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눈앞에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성기가 보였다. 핏줄까지 불거진 두툼한 성기가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다.

남자는 혜윤의 턱을 아프지 않게 잡아 올렸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머리가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생각을 멈추었다. 시야에 남자의 짙은 눈썹과 곧은 콧대가 담겼다.

얼굴을 또렷하게 담아내기 전에 혜윤은 들어 올려졌다.

“어?”

놀라 뱉어낸 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혜윤의 몸이 팔레트 위로 올려졌다. 혜윤이 남자를 저지할 틈도 없이 바지와 속옷이 끌어 내려졌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한기에 다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뜨거운 손바닥이 혜윤의 허벅지를 쓸어올렸다. 손바닥이 지나간 자리가 뜨끈했다. 남자가 다리 사이에 제 몸을 껴 넣었다. 벌려진 양다리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허리에 혜윤이 긴장한 듯 몸을 굳혔다.

“아!”

젖지 않은 뻑뻑한 구멍에 귀두를 맞춘 남자가 허리를 밀어 넣자 혜윤이 아픈 소리를 내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막무가내로 혜윤의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혜윤의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픔을 참아 보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씨발.”

남자는 혜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조급해 보이던 남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작은 구멍 앞에서 멈춰 섰다.

“네가 해.”

남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혜윤이 눈을 굴리자 남자가 혜윤의 손을 거칠게 잡아 아래로 가져다 댔다.

“네가 하라고.”

잡힌 손을 빼내지도 못하고 요구처럼 만지지도 못한 채 눈을 굴리자 남자가 손가락 하나를 펴 클리토리스에 내려놓았다. 당황스러운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해 봤을 거 아니야. 하라고.”

남자는 당황스럽고 난처한 요구를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피 볼래?”

코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혜윤이 마른입만 다시자 입구에 닿아 있던 검붉은 성기가 재촉하듯 꺼덕거리며 음부를 비벼댔다.

혜윤은 이 순간의 자신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혜윤의 손가락이 클리토리스를 어설프게 비비기 시작했다. 마른 손이 갑자기 비벼오자 따갑기만 할 뿐이었다.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제 입 속에 혜윤의 손가락을 넣었다. 단단하고 뜨거운 혀가 손끝에 닿았다. 혀는 유영하듯 혜윤의 손가락을 한참 동안이나 핥아댔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손끝에서 새어 나왔다.

만족스러울 만큼 혜윤의 손가락을 빨아댄 남자가 친절하게도 클리토리스 위에 타액으로 젖은 손가락을 내려놓았다.

“비벼.”

원초적인 요구에 혜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 클리토리스를 비비기 시작했다. 젖은 손가락으로 움직이니 아까보다 조금은 부드러운 움직임이 되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어설프게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는 혜윤을 남자가 빤히 내려다보았다. 핏줄이 불거지고 한계까지 커진 자신의 성기를 큰 손으로 한번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쿠퍼액이 묻어났다.

남자가 혜윤의 입구를 뭉툭한 손끝으로 지분거리다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한 마디가 채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뻑뻑하기만 했다.

남자가 초조하다는 듯 울컥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억지로 들어갈까, 남자의 마음에 갈등이 일었지만 제 클리토리스를 열심히 비비고 있는 혜윤을 내려다보며 이 광경을 조금 더 즐겨보자고 마음먹었다.

남자는 한 손으로 혜윤의 갈라진 곳을 벌리며 다른 손의 엄지손가락을 혜윤의 입 안에 넣었다.

“빨아.”

혜윤은 입을 동그랗게 모아 남자의 손가락을 빨았다. 손가락을 입에서 빼낸 남자는 타액이 묻은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지그시 눌러 비볐다.

“헉….”

남자의 갑작스러운 손길에 혜윤이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들썩였다. 남자의 손길은 오로지 혜윤의 흥분이 목적이었다.

목적이 다분한 손길이 어루만지자 작은 입구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남자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이는 구멍에 검지를 밀어 넣었다. 남자는 초조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입구 안을 꾹꾹 눌러가며 클리토리스를 자극하자 손가락 끝에 축축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배꼽 위까지 바짝 선 성기를 큰 손으로 몇 번 쓸어낸 후 귀두를 비벼 밀어 넣었다. 아직은 다 풀리지 않은 입구에서 귀두가 빗겨 나왔지만 남자는 제 성기를 잡고 다시 입구를 지그시 눌렀다.

“아흑.”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길 원할수록 혜윤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남자의 성기가 몸속의 장기를 밀어내는 것같이 느껴졌다. 혜윤은 자신을 짓누르는 몸을 무의식적으로 밀어보려 했지만 밀리지 않았다.

남자는 점점 깊숙이 안으로 들어왔다. 꽉 물어오는 입구에 허리를 밀었다가 멈추고 다시 조금 빼내고 다시 더 깊게 넣으며 성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자신을 밀어내는 혜윤의 손목을 잡아 내리고 혜윤이 도망갈 수 없게 골반을 더 깊이 눌렀다.

남자의 성기가 안으로 전부 들어왔다. 배 안 가득 느껴지는 남자의 성기에 혜윤은 버거운 듯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는 틈을 주지 않고 허리를 처박았다.

“으, 읏, 흣.”

남자가 치받을 때마다 혜윤이 숨이 막힌 소리를 뱉어냈다.

멈추지 않는 추삽질에 온몸이 흔들렸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혜윤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겨 게걸스럽게 허릿짓을 했다.

“윽, 하윽.”

퍽퍽 살 부딪치는 소리와 숨소리만 섞여들었다. 남자가 혜윤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안에 다 차지도 않은 가슴을 주무르다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단추를 뜯어내고 속살을 훤히 드러내 보였다.

남자가 바짝 선 유두를 빨자 혜윤이 몸을 움찔거렸다. 욕심 가득 가슴을 물고 빨아대며 손으로는 반대편의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지분댔다.

혜윤이 남자의 손길에 반응하며 움직이자 남자는 더 집요해지고 더 거칠어졌다.

“하윽, 흣, 아으.”

혜윤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 남자의 모습이 가득 들어찼다.

“눈 감지 마.”

남자는 허릿짓을 하며 혜윤의 눈을 보았다. 두 눈이 마주하자 남자는 곧장 고개를 내려 혜윤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남자와의 키스는 섹스와 똑같았다. 두꺼운 혀를 쑤셔 넣고 입 안을 헤집어 혜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혀뿌리를 뽑아 들 듯 휘감았다가 혀끝을 쪽쪽 빨아댔다. 혜윤의 혀끝을 핥고 입천장을 간지럽히며 추삽질을 이어갔다.

극으로 치닫는 혜윤의 허벅지가 발발 떨려왔다. 남자는 잡고 있던 골반을 놓고 혜윤의 허벅지를 더 크게 벌려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왔다.

한 번도 닿지 않았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성기에 혜윤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입이 벌어졌다.

남자는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흥분에 몸부림치는 혜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혜윤의 발가락이 곱아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며 눈에 빛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으윽….”

목 안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리를 뒤틀며 엉덩이에 힘을 주자 남자는 골반을 잡고 빠르게 허릿짓을 했다. 눈앞에 봉긋 솟은 가슴을 게걸스럽게 빨아대며 치받을 때마다 혜윤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으, 아으, 흣.”

혜윤이 온몸에 힘을 주며 남자에게 매달려 왔다. 이에 응답하듯 남자는 턱 근육이 튀어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며 허릿짓을 했다. 공사장 안에 퍽퍽 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하으으….”

긴 신음과 함께 혜윤의 몸에서 힘이 풀렸지만 남자의 거친 허릿짓은 멈추지 않았다. 하얀 몸에 손자국이 찍힐 정도로 힘을 준 남자가 허리를 말아 혜윤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숨을 내뱉었다. 혜윤의 안에서 남자의 흔적들이 새어 나왔다.

두 숨소리가 짧게 엉켰다 떨어졌다. 남자가 몸에서 나오자 상실감에 혜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자는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자신의 옷을 정리하고 혜윤을 쳐다보았다.

“옷은 못 입겠네.”

자신이 찢어 버린 혜윤의 셔츠와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쩔 수 없지, 뭐.”

남자는 혼자 결론을 내고 자신의 검은 코트를 벗어 혜윤을 여몄다. 마치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겠다는 듯 혜윤을 폭 감싸고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남자가 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서 뒷짐을 서고 있던 부하들이 짧게 묵례했다. 고개를 든 사내들이 일제히 남자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린 것을 쳐다보자 남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눈깔 안 돌리냐?”

심기가 불편한 음성에 모두가 황급히 눈을 바닥으로 깔았다. 남자는 그제야 만족한 듯 누군가를 불렀다.

“황 실장.”

“네. 대표님.”

“차 안 가져오고 뭐 해?”

당황함에 넋을 놓고 있던 황 실장이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황 실장은 차 쪽으로 뛰어가며 남자에게 매달려 있는 여자의 얼굴을 힐끔거렸지만 꽁꽁 싸인 여자의 모습을 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

“다시 한번 말해 봐.”

칠이 다 벗겨진 허름한 대문 앞에 두 부녀가 서 있었다. 중년의 남자와 남자의 어깨보다 조금 더 큰 여자아이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가 불만스럽다는 듯 얼굴을 불퉁거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걸 왜 해야 하는데?”

중년의 남자의 것과 엇비슷하게 생긴 눈썹은 펴질 줄 모르고 점점 찌푸려져 코에 주름이 생겼다.

“빨리, 어? 안 해?”

아버지가 얼굴을 험상궂게 굳히자 아이가 금세 기가 죽어 어깨를 늘어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저 병 있어요.”

“또.”

“…옮아요.”

아버지가 계속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자 아이가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피, 침, 땀 모두 다요.”

아이가 말을 마치고는 아버지에게 눈을 흘겼다. 아버지는 아이가 눈을 흘기든 말든 안심이 되었다는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원장선생님한테 꼭 그 얘기 해야 해.”

“왜 얘기해야 하는데! 나 병도 없는데!”

혜윤이 아버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한 얼굴을 삐죽거리며 금방이라도 대문을 차 버릴 듯 씩씩대었다. 하지만 꼬질꼬질한 운동화는 대문 한 번을 차 보지 못하고 흙바닥만 긁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성질은 지 엄마 닮아 가지고.”

아버지가 혜윤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아프게 문질렀다. 볼을 한번 꼬집어 늘리고는 어깨 위에 걸려 있는 가방을 혜윤에게 건넸다.

가방의 지퍼를 열어 약이 가득 든 비닐 팩을 보여 주었다.

“아침, 점심, 저녁 꼬박꼬박 먹어. 보여 줘야 더 믿지.”

“…….”

혜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약봉지를 거칠게 뺏어 가방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그냥 영양제야. 먹으면 몸에 좋아.”

“몸에 좋은 거 누가 몰라?”

달래듯 가벼운 농담을 건넨 아버지를 노려보며 혜윤이 씩씩댔다.

“정말 일주일 있다가 올 거야. 이번엔 진짜야.”

아버지가 말을 꺼내자 혜윤이 땅바닥을 쳐다보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바닥을 쳐다보는 눈에 물기가 어렸다.

“거기 안 가면 안 돼?”

혜윤이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런 말 하지 말랬지.”

아버지는 작은 물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혜윤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며 흙바닥을 적셨다.

“일주일 뒤에 올게. 진짜야! 저번처럼 늦지 않을게.”

훌쩍이는 혜윤의 얼굴 밑으로 아버지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혜윤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자 아버지는 다정하게 웃으며 눈물 젖은 혜윤의 눈을 닦아 주었다.

“너는 눈은 엄마를 닮아서 아빠가….”

아버지는 뒷말을 삼켰다. 아버지의 씁쓸한 눈빛에 혜윤이 입 안 살을 깨물었다.

“돈 많이 따서 우리 혜윤이 선물 큰 거 사 가지고 올게!”

아버지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혜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어두운 얼굴을 했다.

“선물 안 가져와도 돼.”

“왜애! 아빠가 돈 많이 따서….”

“됐다고! 시간 맞춰서 오기나 해!”

혜윤이 큰 소리를 내며 아버지의 새끼손가락에 억지로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쉽게 내쳐질 약속이라는 것을 앎에도 혜윤이 믿을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혜윤의 새끼손가락을 힘주어 걸며 웃었다.

“진짜 일주일 뒤에 온다니까, 아빠가 딸 두고 어디 가! 아빠가 이러는 게 다 좋은 집에서 살게 해 주려고 그러는 건데.”

“집 안 좋아도 돼. 진짜야.”

우물거리며 말을 내뱉는 혜윤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눌렀다. 혜윤의 입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다.

“너는 진짜 엄마랑 똑같다. 혜윤아.”

아버지가 혜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버지는 혜윤의 손을 잡고 낡은 대문을 열었다. 끼익거리며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혜윤이 다른 한 손으로 제 귀를 막았다.

“아주 신파 났네.”

대문 옆 샛길에 삐딱하게 선 소년이 안으로 들어가는 부녀를 보았다. 성인과 소년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소년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비웃음 뒤에 칭얼대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눈에 걸렸다.

맑은 하늘을 닮은 듯한 깨끗하고 순한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소년이 대문을 밀자 또다시 끼익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가자 혜윤의 뒷모습이 보였다.

베이지색 체크무늬 남방과 파란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모습일 뿐인데 걸어가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궁금하다는 듯 시설을 두리번대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소년이 자리에서 그대로 멈췄다. 굳게 닫힌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여자아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멍하게 지켜보던 소년이 누군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태석아! 아까 준비해 놓으라고 한 거 다 준비됐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돌린 태석이 손을 휘휘 젓자 뛰어오던 친구의 발걸음이 늦춰지고 종국에는 뒤로 돌아 자신이 있던 곳으로 뛰어갔다.

태석은 친구의 행동은 신경 쓰지 않은 채 혜윤이 들어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태석이 혜윤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아주 늦은 저녁이었다. 용역으로 불려가 성가신 일을 처리하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성가신 몸싸움을 한 끝에 입 안이 터졌다. 혀끝에 닿는 느낌이 쓰라렸다. 얼굴을 찌푸리며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한동안 입 안의 상처가 귀찮아지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복도의 끝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있어요.”

태석이 소리에 이끌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에요.”

작고 희미한 소리를 따라 불이 켜진 원장실 앞까지 다가간 태석이 작은 문틈 사이로 보이는 뒤통수에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옮아요.”

“뭐?”

원장의 사나운 기세에 혜윤이 몸을 움츠렸다.

“침이나 땀으로 옮아요. 피로도요.”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혜윤은 또박또박 말했다.

존나 불쌍하네.

태석은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덜덜 떠는 혜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혜윤이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원장에게 내밀었다.

“저 약도 먹어요. 진짜예요.”

혜윤의 말에 태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걸 진짜 하네.

짜증이 난 듯 불퉁한 얼굴로 아버지와 실랑이를 하던 혜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 씨발.”

통하지 않는 장난질이라고 생각했던 태석에게 원장이 신선한 반응을 보였다. 원장이 먹는 영양제의 개수를 떠올리며 의외로 먹히는 거짓말인가, 싶었다.

혜윤은 손을 덜덜 떨면서도 원장에게 펼친 손바닥을 접지 않았다.

원장이 너무나 쉽게 믿는 모양새에 태석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병신.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원장을 보며 태석이 그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쉬웠다.

“재수 없게 이런 년을….”

찰싹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던 혜윤의 뒤통수가 소파 밑으로 사라졌다. 태석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저 애가 버틸 수 있을까?

태석은 문득 잠깐 마주쳤던 여자아이의 눈을 떠올렸다. 태석이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 원장이 누구냐며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태석이 문을 열어 얼굴을 보이자 원장이 하얀 메리야스 차림으로 뚱뚱한 배를 크게 부풀리며 숨을 쉬고 있었다.

“뭐야.”

시근덕거리는 소리가 여자아이에게 향하는 것도 아닌데 여자아이는 불쌍하게 덜덜 몸을 떨었다. 찰나의 순간 태석의 눈동자가 덜덜 떠는 혜윤의 모습을 담았다.

태석은 순식간에 표정을 감추고 감흥 없는 눈으로 원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일은 잘 끝냈습니다. 내일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방에 불이 켜져 있어서.”

원장은 커다란 배를 오르내리며 흉악하게 숨을 내쉬다가 감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했다.”

허공을 가르던 손이 태석의 뺨을 기분 나쁘게 툭툭 쳤다. 태석은 익숙하게 묵묵히 손길을 받아냈다.

태석이 고개를 숙이자 원장은 태석을 비껴 먼저 원장실을 나섰다.

태석도 몸을 반쯤 일으키고 떠는 혜윤을 눈동자로 한번 훑고는 방 밖으로 나왔다.

*

Comments

    1. Maple Leaf Jun 29, 2025
      그날 이후 태석은 혜윤을 일찍 불러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혜윤은 그날 자신의 ‘열심히’를 떠올리며 멋쩍게 목 뒤를 긁었다. 나쁠 것이 없었으니 다행이었으나 다음부터는 그런 행동은 다시는 못할 것 같았다. 마감 시간 문제를 해결하니 또 다른 문제가 찾아왔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정사가 끝나고 태석이 호텔 방을 떠나면 뒤이어 혜윤이 호텔 방을 떠났다. 가끔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카페로 바로 출근할 때도 있었다. 잠이 부족해 피곤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태석을 만날 때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컸지만, 육체적인 스트레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체력이 점점 달려 피곤을 견디지 못했다. 두 눈이 무거웠고 결국 눈의 핏줄까지 터졌다.


      혜윤은 피곤한 눈두덩이를 손으로 꾹 누르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이혜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혜윤이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눈에 보이는 검정 코트 자락을 따라 고개를 올리니 태석이 혜윤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아, 아, 아, 안녕하세요.”


      혜윤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여기서 만날 사람이 아니었다. 태석은 원래 혜윤이 도착하기 전부터 호텔 방에 도착해 있었다. 거의 매일 태석을 만나다시피 했지만 혜윤보다 늦게 도착하는 날은 없었다.


      혜윤은 당연히 오늘도 그럴 줄 알았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혜윤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태석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혜윤은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열리지 않은 엘리베이터 문에 눈을 고정했다.


      태석은 어색하게 구는 혜윤을 쳐다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침묵을 유지한 채 스위트룸 안까지 들어왔다. 호텔 밖에서 만나는 게 이렇게까지 어색한 일인지 몰랐다.


      “뭐 해, 왜 멀뚱히 서 있어?”


      태석은 혜윤과는 다른지 대수롭지 않게 코트를 벗어 소파에 걸쳤다.


      “아, 네, 들어갈게요.”


      움직이는 태석의 손을 혜윤의 시선이 좇아갔다. 의미 없는 시선이 하얀 셔츠를 푸는 태석의 손에 닿았을 때 황급히 눈을 피했다.


      “먼저 씻을게.”


      “…….”


      혜윤은 대답 없이 소파에 조심스레 앉았다.


      “왜 대답이 없어? 같이 씻고 싶어?”


      “아니요.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멍청한 소리를 하는 혜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피식 웃으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탁 닫히는 문소리에 혜윤이 숨을 내뱉었다. 언제 기다리는 쪽은 태석이었는데 혜윤이 씻고 나올 태석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낯설었다. 자꾸만 물소리가 들려서 더 신경이 쓰이고 긴장이 됐다.


      긴장도 잠시 물소리가 길어지자 혜윤이 무거운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조명도 어두워서 더 몸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이러다 곧 잠이 들 것 같았다.


      혜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다가 잠이라도 들면 남자가 화를 낼 것이다. 혜윤은 눈을 부릅뜨며 가구 사이를 걸어 다녔다. 몇 발자국 걸으면 끝이 나는 자신의 집보다 훨씬 큰 거실을 돌아다니며 눈으로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호텔 방 안에서 둘러보는 것이 처음이라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혜윤이 아는 호텔 방은 침대와 작은 책상이 놓인 방이었는데, 태석과 만나는 스위트룸은 거실도 있고 침실도 있고 또 작은방이 준비되어있었다. 하룻밤을 자는데 이렇게 많은 방이 필요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혜윤이 방 안을 걸어 다니다 멈춰 선 곳은 새하얀 침구가 놓여 있는 침대 앞이었다.


      “뭐야, 어디 갔나 했더니.”


      갑작스러운 소리에 기겁하듯 놀라며 뒤를 돌았다. 태석은 뭘 그렇게 놀라느냐고 말하며 혜윤을 향해 다가왔다.


      태석이 다가올수록 숨이 막혔다. 위압감에 혜윤이 눈동자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시선이 태석의 허리선에 닿았다. 태석이 움직일 때 같이 묵직하게 덜렁거리는 성기를 발견하고는 잽싸게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태석이 입꼬리를 올리며 혜윤의 손을 겹쳐 잡았다.


      “그렇게 먹고 싶다고 쳐다보면….”


      혜윤의 손등을 포개 제 사타구니 사이로 가져다 댔다. 혜윤의 손바닥에 묵직한 성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좀 흥분되는데.”


      태석은 혜윤의 손을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이게 만들면서 한 손으로는 혜윤의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수많은 밤 몸을 섞었는데도 내외를 하는 모습을 보며 태석이 등을 굽혀 혜윤의 입에 입을 맞췄다. 태석의 입술이 혜윤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다 놓아주고는 이마를 맞대었다.


      “오늘도 열심히 하려는 태도는 좋네.”


      태석은 혜윤을 볼 때마다 놀려댔다. 혜윤의 목 뒤가 불타오르듯 붉어졌다. 태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놀리는 맛이 있었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수치를 담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일 게 뻔했다.


      혜윤이 우는 것을 보는 것도 좋지만 한번 울기 시작하면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섹스할 때는 달갑지 않았다. 태석은 이쯤에서 그만 놀리기로 하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태석은 혜윤의 속눈썹을 내려다보았다. 가끔 뜬금없이 제 머릿속을 헤집는 여자의 얼굴을 뚫어질 듯 자세히 쳐다보았다.


      혜윤은 태석의 두 눈이 부담스러웠다.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말라며 머리채를 잡아오는 우악스러운 손길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태석의 큰 손이 혜윤의 상의를 잡아 벗겨냈다. 입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와 갈빗대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혜윤이 얕은 숨을 내쉬며 태석의 가슴팍을 미약하게 밀어냈다. 태석은 자신을 밀어내는 두 손을 아프게 잡았다.


      아픔에 얼굴을 찡그리는 혜윤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한 번만 더 밀어내면….”


      태석은 혜윤의 볼을 이로 깨물었다. 뺨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에 혜윤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혜윤이 자신의 뺨을 더듬었다. 혜윤의 눈꼬리 밑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태석이 혜윤을 내려다보자 혜윤의 턱이 호두처럼 일그러지며 아랫입술이 파들거렸다.


      혜윤을 내려다보던 태석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뺨에서 손을 치워내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엄살은.”


      태석의 말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남자에게 희롱당하는 삶에 대한 설움까지 밀려들었다. 태석은 혜윤을 안아 들고 침대에 앉혔다. 뺨이 살짝 빨갛게 부어올랐다.


      혜윤은 피부가 약해 빨면 빨리는 대로 자국이 났다. 자국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태석은 어느 땐 그런 사실이 만족스러웠지만, 지금처럼 조금 깨물었다고 부어오르는 건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태석은 혜윤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떼어냈다. 엄지손가락으로 혜윤의 턱을 잡고 흔들자 혜윤이 반사적으로 눈을 들어 태석을 쳐다보았다.


      “아프게 문 것도 아닌데.”


      아팠다. 남자는 매번 엄살이라고 했지만 혜윤은 매번 아프고 매번 서러웠다. 혜윤은 원망이 섞인 눈을 했다. 태석은 혜윤의 감정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불순한 감정에 입 밖으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


      태석의 말에 혜윤이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태석은 자신이 혜윤에게 그렇게 무섭게 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면 잘해 주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혜윤이 매번 주눅 든 모습을 보이는 게 태석으로선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까칠하고 겁 없는 혜윤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건 그거대로 괜찮을 것 같은데,


      태석이 피식 웃으며 혜윤의 붉은 뺨을 쓰다듬고 입을 맞췄다. 태석의 손이 갈빗대를 지나 골반을 지분거렸다. 손놀림이 짙어질수록 안겨있는 혜윤의 입 밖으로 달뜬 숨이 내뱉어졌다.


      태석은 혜윤을 침대에 눕혀 다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감추어져 있는 클리토리스를 찾아 음순을 벌렸다. 혜윤이 다리를 오므리려고 하자 태석이 허벅지를 잡아 눌렀다.


      “하으.”


      태석이 손이 움직일 때마다 혜윤은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태석은 자신의 손에 달뜬 숨을 내뱉는 혜윤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혜윤의 몸을 잠식해 나갔다.


      “하앗. 으, 하으.”


      혜윤의 다리가 덜덜 떨리고 턱이 들리며 큰 숨이 내뱉어졌다. 혜윤의 눈이 흥분에 감겨가자 태석이 눈가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귀두를 혜윤의 입구에 밀어 넣었다.


      “윽.”


      태석이 처음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 버거웠다. 길을 내듯 꾸역꾸역 들어오는 성기에 혜윤이 가쁜 숨을 쉬었다.


      천천히 들어오던 성기가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단숨에 꽂혔다.


      “윽!”


      태석이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는 동안 혜윤은 태석의 몸에 매달렸다. 태석의 어깨를 잡은 두 손끝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자신도 모르는 눈물이 눈꼬리에서 매달릴 때까지 태석의 허릿짓은 멈추지 않았다.


      체력은 점점 달리고 상황은 버거워지기만 했다. 떨어지는 체력에 혜윤은 집중하지 못했다.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침범했다. 태석이 주는 쾌락도 어지러운 생각들을 다 비워낼 수 없었다.


      태석은 집중하지 못하는 혜윤을 보며 눈이 가늘어졌다.


      “집중, 안 하, 지.”


      “읏!”


      태석이 혜윤의 유두를 이를 세워 깨물었다. 퍽퍽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혜윤의 입이 한껏 벌어지며 몸이 들렸다.


      “내 좆만으로는 부족한가 보지?”


      “하읏! 윽! 읏!”


      거친 몸짓에 혜윤이 고개를 저으며 태석의 가슴을 밀어냈다.


      태석이 자신을 밀어내는 혜윤의 두 손목을 잡아채 위로 고정했다. 혜윤이 헐떡이며 태석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대체 몇 번을 알려 줘야 하는 거야?”


      태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서슬 퍼런 목소리로 혜윤의 이름을 불렀다.


      태석이 혜윤을 안아 들었다. 성기를 꿴 채로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허공에 뜬 몸에 혜윤이 바둥거렸다. 태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욕실로 가 혜윤을 내려놓았다. 태석의 가슴과 혜윤의 등이 맞닿은 채로 긴 세면대 위에 혜윤의 한 발을 올리고 다른 한쪽 발은 태석이 발로 밟아 미끄러지지 않게 고정시켰다.


      “눈 떠.”


      두려움에 눈을 살짝 뜬 혜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태석이 혜윤의 뺨을 쥐고 손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이야. 눈 떠.”


      혜윤이 느리게 눈을 떴다.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었다. 자신의 몸에 태석이 만들어 놓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음부에는 흉기 같은 태석의 성기가 꿰여 있었다.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한 번만 더 눈을 돌리면 지금까지 했던 섹스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태석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음부에서 성기가 움직이는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태석은 한 팔로 혜윤의 팔을 접어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훤히 드러난 클리토리스를 만져댔다.


      태석의 경고에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쳐다보는 게 힘이 들었다. 혜윤은 고개를 저으며 반항하듯 몸부림쳤다. 몸부림치는 혜윤을 제지하기에는 태석이 손이 모자랐다. 태석은 음부를 만지고 있던 손으로 클리토리스를 내리쳤다.


      욕실에 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림과 함께 혜윤의 동작이 일순간 멈췄다.


      “흐윽, 하지 마, 싫어.”


      “좋아하는 거 같은데? 꽉꽉 조이는 것 봐, 좆 끊어먹겠네.”


      태석이 혜윤의 반항에 비웃으며 다시 손을 올렸다.


      “으흑.”


      혜윤의 입 밖으로 서러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차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태석은 혜윤의 클리토리스를 내려치는 대신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휘저었다.


      “봐, 네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태석이 뒤에서 속삭이며 허리를 퍽퍽 쳐올렸다.


      “싫어하는 거 아니잖아. 봐, 좋아서 꽉 물고 안 놔주는 거.”


      태석은 매번 자신의 좆을 끊어먹을 만큼 꽉 물고 늘어지면서 아닌 척 구는 혜윤이 얄미웠다. 태석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클리토리스를 비비고 진동을 주듯 움직였다. 태석의 품에 단단히 안긴 혜윤의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윽, 흣, 흐응.”


      굵고 뭉툭한 귀두가 안을 버겁게 비집어 채웠고 태석의 손은 혜윤의 클리토리스를 비비며 자극을 주었다. 태석의 혀가 혜윤의 목을 핥아 올리며 몰아붙였다.


      발끝이 덜렁거릴 정도로 흔들렸지만 태석이 꽉 붙들고 있어 넘어지지도 못했다.


      “아, 아흣… 흐읏.”


      혜윤의 음부에서 소변도 아니고 애액도 아닌 묽은 액이 터져 나왔다. 태석이 움직일 때마다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욕실 바닥으로 알 수 없는 액체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태석이 혜윤을 옭아매듯 안고 몸을 더 꽉 안아왔다. 혜윤의 어깨 위에 있는 태석의 입술에서 낮은 숨이 새어 나왔다. 느리게 움직이는 허리 밑으로 하얀 정액이 떨어져 내렸다.


      태석이 몸을 살짝 놓아주자 혜윤이 비틀거렸다. 태석은 혜윤을 들어 안아 세면대 위로 올려 앉혔다. 혜윤의 몸은 흥분에 잘게 떨렸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엉망이었다.


      다물어지지 않은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태석은 큰 손바닥으로 혜윤의 뺨을 쓰다듬었다. 혜윤이 고개를 돌려도 기어이 따라와 혜윤의 눈물을 닦아주고 쪼듯 입을 맞춰댔다. 마치 혜윤을 달래는 것처럼.


      “왜 울어. 쌀 정도로 좋아했으면서.”


      태석의 말에 혜윤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이거 무서운 거 아니야. 좋아서 싼 거야.”


      태석이 손으로 몇 번 더 눈물을 닦아 주었다. 태석의 달램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혜윤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몸을 돌려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렸다. 우는 것에도 지친 혜윤이 멍하게 바닥만 보고 있었다.


      태석이 다시 다가와 주저함 없이 혜윤을 들어 안았다. 태석은 혜윤을 안아 들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쏟아졌다. 태석은 혜윤의 등을 물이 쏟아지는 쪽으로 세우고 물 묻은 손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좋은 거야.”


      태석은 혜윤을 다시 한번 달랬다. 힘이 없는 혜윤이 휘청거리자 태석이 혜윤을 바로 세웠다.


      손에 비누를 묻히고 손바닥으로 혜윤의 몸을 문질렀다. 팔을 지나 어깨와 가슴을 문지르다 손바닥에 스친 혜윤의 유두를 살살 문질렀다.


      아직 흥분의 여파가 남아 있는 혜윤의 몸이 움찔 떨리자 태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주 바라본 상태로 거품 묻은 손이 등을 쓰다듬고 엉덩이 쪽으로 손을 진득하게 비비며 내려갔다. 두 엉덩이를 한번 꽉 쥐고 몸을 굽혀 두 다리를 문질렀다. 몸을 굽힌 태석의 얼굴 앞에 혜윤의 음부가 드러났다.


      태석이 고개를 올려 혀를 길게 빼내 둔덕을 핥았다. 혜윤이 뒤로 물러서자 태석이 허벅지를 잡아 다시 제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휘청거리는 혜윤의 다리를 벌리고 제 어깨를 손으로 짚게 만들었다.


      어깨에 손을 올리자 태석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클리토리스를 할짝댔다.


      “읏.”


      태석은 가볍게 할짝대던 것을 멈추고 얼굴을 더 깊숙이 묻었다.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이 클리토리스를 강하게 빨아당기자 혜윤의 다리가 후들댔다.


      “아흑.”


      태석은 정염이 섞인 눈으로 혜윤을 바라보았다. 혜윤의 달뜬 얼굴을 보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태석이 일어나 혜윤을 욕실 벽으로 밀어붙였다.


      타일 벽면에 혜윤의 가슴이 눌렸다. 한쪽 다리를 올려 벽에 붙이고 흉흉하게 서 있는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이미 눅진하게 풀어진 질구가 태석을 쉽게 받아들였다. 안을 채우는 성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혜윤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혜윤은 떨어지는 따뜻한 물방울을 맞으며 밭은 숨만 내쉬었다.


      혜윤의 시야가 몽롱해졌다.


      태석은 축 늘어진 혜윤을 수건으로 둘둘 말아 안아 들었다.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진 혜윤의 뱃가죽이 얕게 오르내렸다. 태석이 혜윤의 수건을 걷어내고 이불을 덮어 주려다 부어오른 유두를 보았다.


      태석이 손가락 끝으로 살짝 만지자 혜윤이 몸을 뒤척였다. 태석이 혜윤을 보다 발목을 잡아 살짝 다리를 벌렸다. 음부도 유두와 마찬가지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태석은 혀를 끌끌 찼다. 고작 몇 번 만졌다고 부어버린 몸을 보며 혜윤이 보이는 것만큼이나 유약하다고 생각했다.


      태석은 침대 옆 협탁의 전화기를 들고 혜윤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태석이 전화통화를 하는 그 순간에도 혜윤은 고른 숨을 내뱉으며 깊은 수마에 빠져 있었다.


      태석이 문 앞에서 무엇인가를 받아왔다. 하얀 비닐봉지에 싸인 물건을 털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를 까고 안의 내용물을 들어 주의사항을 읽었다.


      태석은 설명서를 다 읽고 나서야 연고를 손가락에 듬뿍 짜냈다. 옆으로 누워 있는 혜윤을 바로 눕히고 연고를 덕지덕지 발랐다.


      “으음….”


      혜윤이 잠결에 얼굴을 찌푸리자 태석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연고를 짜내 투박하게 발라 주고는 다른 연고를 꺼내 들었다. 허벅지를 벌리고 두 손가락으로 음순을 벌렸다. 발갛게 부어 있는 클리토리스와 입구에 꼼꼼하게 발랐다. 혜윤의 허벅지에 돋아 있는 소름을 큰 손바닥으로 문지르더니 자신이 입고 있는 가운을 벗었다.


      따뜻한 가운을 혜윤에게 입혀 주고 허리띠를 묶었다. 혜윤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 다시 혜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뭐만 하면 겁을 먹고 성가시게 울기만 했다.


      그냥 죽여 버리면 되는데.


      태석의 손이 혜윤의 목에 손을 올렸다. 한 손으로 다 쥐어지는 가는 목을 보았다. 부모도 없고 주변에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처리하기 가장 쉬운 부류였다.


      혜윤이 답답한 듯 목을 움직이자 태석이 손을 떼어냈다.


      아무래도 죽여 버리기엔 아깝지.


      왜 죽이기 아까운지 태석도 몰랐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어르고 달래서 섹스를 할 만큼 속궁합이 좋아서 그런 것일 거라고 짐작만 했다.


      태석은 손으로 혜윤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혜윤이 누워 있는 침대의 옆자리에 태석도 올라가 누웠다.


      *


      태석이 잠에서 깨어났다. 늦은 새벽 눈을 뜨는 것은 태석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새벽의 침묵이 드리워진 어두운 공간에 낯선 숨소리가 들렸다. 태석은 눈동자가 소리를 쫓았다. 태석의 눈에 얕게 입을 벌리고 잠든 혜윤의 모습이 비쳤다.


      끊어질 것 같은 유약한 작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태석은 뜬 눈을 다시 감지 않고 혜윤이 숨 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흉곽이 오르내리고 규칙적인 고른 숨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보고에 의하면 혜윤은 태석과 만나는 날엔 제대로 자지 못하고 카페로 출근한다고 했다. 자신이 사장이면 조금 융통성 있게 일을 해도 될 텐데, 혜윤은 매번 시간을 지켜 출근했다.


      태석은 달라지지 않는 지루한 보고를 계속 들으며 혜윤을 주시했다. 찬열의 행방을 알기 위해 감시한다고 하기에는 과한 감이 있었지만 태석은 일일이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태석이 말간 혜윤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손톱 끝에 치아가 닿았다. 조금 힘을 주어 누르니 손톱 밑까지 혜윤의 치아가 느껴졌다. 태석의 손이 조금 더 들어간다면 말랑한 혀를 만질 수 있었다.


      따뜻하고 말랑대는 혀를 만지고 혜윤의 몸을 지분거리면 금방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럼 또 한참을 태석의 밑에서 밭은 숨을 내쉬며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태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태석은 혜윤이 피곤하다고 해서 혜윤과의 섹스를 그만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굳이 혜윤을 깨울 필요까진 없었다. 태석은 혜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겨 안았다.


      태석의 가슴팍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혜윤이 싸한 기분이 들어 눈을 번쩍 떴다. 침대 옆 작은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거칠게 잡아 시간을 확인했다.


      “억.”


      이상한 소리를 내며 팔다리를 휘젓고 벌떡 일어났다. 카페의 오픈 시간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습관처럼 눈이 떠지는 시간대가 있었는데 혜윤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혜윤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소파에 앉아 태블릿 PC를 보던 태석이 움직이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두었다. 시선의 끝에 얼굴이 동그랗게 부어 있는 혜윤이 걸렸다. 뽀얗게 부어 있는 얼굴이 귀여워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꽤 오래 잔다는 생각은 했었다. 깨울까 하다 곤히 잠든 얼굴을 보고 깨우지 않았다. 매번 조용한 모습만 보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혜윤은 태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는지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욕실로 뛰듯이 빠르게 들어갔다.


      태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로 향했다. 발소리를 딱히 죽여 걷는 것도 아니었는데 혜윤은 아직도 태석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세수를 하기 위해 굽혔던 등을 편 혜윤이 거울에 비친 태석의 모습을 보고는 짧게 소리를 질렀다. 혜윤은 태석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태석은 항상 혜윤보다 먼저 호텔 방을 나섰다. 아무리 이른 새벽에 눈을 떠도 태석이 옆에 있는 일은 없었다.


      “사람 보고 왜 그렇게 놀라?”


      “어… 그게….”


      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굴리는 혜윤의 얼굴을 보던 태석이 뽀얀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잠에 부어있는 얼굴을 그러쥐고 주물렀다. 아직 얼굴에 남아있는 물기가 손바닥을 촉촉하게 적셨다.


      “옷 안 갈아입어?”


      태석의 말이 끝나자 혜윤의 얼굴에 다급함이 스쳤다. 혜윤은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찾아내 꿰어 입고 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빗으며 잠깐 거울을 봤다. 거울에 비친 태석이 아직 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윤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태석을 쳐다보았다.


      “저… 지금 나갈 건데….”


      “그래.”


      혜윤이 나가겠다고 하자 태석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혜윤은 당연히 혜윤 혼자 이 방을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혜윤이 가방을 챙겨 들고 문 앞에서 신발을 신자 그 뒤로 태석이 섰다.


      혜윤이 아주 잠깐 낯선 눈으로 힐끗 태석을 쳐다보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을 열었다. 태석도 구두를 꿰어 신었다.


      “나, 나가시는 거예요?”


      “응.”


      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묵례하듯 고개를 숙였다. 가방끈을 꽉 잡고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혜윤은 머릿속으로 계속 카페에 도착하면 어떤 것부터 해야 하는지를 계산했다. 오늘 아침 매출을 늦잠으로 까먹었으니, 주말에 문을 열어 조금이라도 메꿔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 태석과 함께 올랐다. 태석이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혜윤이 자꾸만 눈치를 보았다. 특유의 위압감이 혜윤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혜윤이 다시 짧은 묵례를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태석은 혜윤이 자신에게 몇 번이나 인사를 했는지 세어보았다. 얼굴에 미세한 웃음을 띤 태석이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간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태석은 필시 혜윤이 멍청한 표정을 지을 것이라 단정했다.


      태석은 없던 일정을 만들었다. 혜윤을 데려다주고 회사에 간다면 시간이 조금 촉박하기는 하지만 조금 늦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혜윤이 로비를 두리번거리자 태석이 혜윤의 옆에 섰다.


      “뭐 해?”


      “아, 저 데려다주시는 분….”


      혜윤의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걔를 왜 찾는데?”


      “아, 매번 데려다주셔 가지고, 오늘은 안 오시나요?”


      호텔에서 나오면 항상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혜윤을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태석이 데려다주라고 했다며 혜윤을 싣고 나른 지도 꽤 되었다. 혜윤은 당연히 오늘도 있을 줄 알았지만 태석의 물음을 보니 안 오는 것 같기도 했다. 가장 중요할 때 찾는 사람이 없어서 아쉽기는 했지만 여기서 택시를 타고 가도 충분했다.


      “…안 오시면 그냥….”


      “그냥?”


      태석이 자꾸 되물어 긴장이 됐다. 그냥 자신을 놔두고 태석의 갈 길을 갔으면 좋겠다.


      “그냥 가려고요.”


      “걔 있었으면 걔 차 타고 가려고 했어?”


      “네, 대표님께서 데려다주시라고 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근데 오늘은 나 있잖아.”


      “아… 네….”


      혜윤은 태석의 말에 대답했지만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태석이 있으면 데려다주지 않는 건가?


      “가자.”


      태석의 말에 혜윤이 두 눈만 끔뻑였다. 태석은 혜윤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와 보니 이미 태석의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혜윤은 태석의 차 앞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택시비를 두 배로 받는다고 해도 택시를 타는 게 나았다. 혜윤은 우물쭈물 조수석 문 앞에 서서 입을 달싹였다.


      “문 열어 줘야 탈 거야?”


      “아, 그게, 저는 그냥 택시를….”


      태석이 혜윤의 말을 듣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아, 아니, 호, 호, 혼자 갈게요. 바, 바쁘실 텐데.”


      태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수석의 문을 잡고 혜윤을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얼굴을 기대했더니 마치 경찰차에 연행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타.”


      조금 놀려 주려고 했던 마음을 바꿨다. 태석은 혜윤이 조수석에 타 양쪽 다리를 올리는 것까지 확인하고 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카페? 집?”


      운전석에 앉은 태석이 물었다. 혜윤은 조금 어버버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카페 갈 거냐고, 아님 집으로 갈 거냐고. 계속 두 번씩 묻게 할 거야?”


      태석은 이미 혜윤이 카페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괜히 심술을 부리며 물었다.


      “카, 카페요.”


      혜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동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혜윤은 운전을 하는 태석을 불안한 눈으로 힐끔댔다. 진짜 카페로 데려다주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좀 더 자 둬.”


      태석이 말하며 조용한 음악을 틀었다. 등 뒤가 조금씩 따뜻해졌다.


      “어… 괜찮아요.”


      태석이 잠시 차가 멈춘 사이에 혜윤의 옆모습을 보다 볼을 두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심술을 좀 부려 볼까 했지만 부은 얼굴이 귀여워 크게 심술도 부리지 못했다.


      혜윤의 의심과는 반대로 카페에 무사히 도착했다. 혜윤이 잠깐 멈칫하더니 태석의 눈치를 보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럼… 다음에 뵙… 아니 안녕히… 가세… 세요.”


      횡설수설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리는 혜윤을 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태석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출발하면 회사에 늦지 않게 도착하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차 문을 열었다.


      태석이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소리에 쭈그리고 앉아 열쇠를 돌렸다.


      설마 아니겠지….


      혜윤이 등 뒤로 느껴지는 인영을 부정했다. 아주 느리게 쭈그리고 앉아 있던 몸을 펴자 옆에 딱 하고 태석이 버티고 서 있었다. 혜윤이 문손잡이를 잡고 삐걱삐걱 태석을 쳐다보았다.


      “문 안 열어?”


      태석이 묻자 혜윤이 눈알을 굴리며 문을 힘주어 밀었다. 카페의 문이 열리자 태석은 마치 자신의 가게인 듯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혜윤은 먼저 들어간 태석의 뒷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카페의 문을 열어놓은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로 들어가자마자 앞치마를 매고 포스기를 켰다. 태석은 카운터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흥미로운 얼굴로 혜윤을 쳐다보고 있었다.


      혜윤은 익숙한 듯 차례대로 움직였다. 에스프레소 기계를 예열시키고 오늘 해야 할 것들 목록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커, 커피 드실래요?”


      태석이 저러고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데 뭐라도 권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에스프레소 기계가 아직 예열이 안 돼서, 한 오 분만 기다리시면 돼요.”


      “그래.”


      혜윤은 괜히 매대를 정리하는 척했다. 짧은 침묵이 돌았다. 테이블도 닦고, 매장을 청소해야 했지만 태석이 테이블에 떡하니 버티고 있어 나가서 정리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늦게 열었네요.”


      열린 문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손님에 혜윤이 습관적으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두 뺨에 보조개가 움푹 패었다.


      “아, 오늘은 늦잠 잤어요.”


      혜윤이 멋쩍은 듯 웃으며 주문하려는 남자와 마주 보며 웃자 태석의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부지런한 혜윤 씨가 웬일이에요.”


      혜윤과 카운터에 서 있는 남자는 친근해 보였다.


      “주문하시겠어요?”


      “저는 늘 먹는, 아메리카노 아이스요.”


      “네. 근데 기계가 예열이 아직 안 돼 있어서요. 한 2분 기다리셔야 해요.”


      “뭐, 괜찮아요. 2분 정도 더 농땡이 치죠.”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혜윤이 그런 남자를 보며 입꼬리를 더 끌어 올렸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태석의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배알이 꼴렸다. 자신에게는 무표정하게 대하면서 누구에겐 웃어 준다는 사실에 태석이 혀로 볼 안쪽을 쓸었다.


      “오늘은 머리 푸셨네요. 잘 어울려요.”


      “아, 감사합니다.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저 여기 알고 나서 오늘처럼 늦게 여는 걸 처음 봤어요.”


      “늦잠을 좀…. 아침에 오셨다가 그냥 가신 거예요?”


      “네, 그래서 혹시 지금은 문 열었을까 봐 한번 들러 봤는데.”


      “아, 죄송해요. 제가 쿠키라도 하나 서비스로 넣어 드릴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거 받으려고 말씀드리는 거 아니에요.”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태석은 느리게 고개를 움직였다.


      “언제 한 번은 꼭 서비스 드리고 싶었어요. 회사에서 계속 커피는 저희 카페에서 주문해야 한다고 그러신다면서요?”


      “맛있는 거 먹자는 건데, 당연하죠. 저는 이 동네에서 여기만큼 맛있는 커피를 못 마셔 봤어요.”


      “송 대리님이 여기서 무슨 거래 하냐고, 한 잔당 커미션 받느냐고 그러던데요.”


      “송 대리가요?”


      남자가 웃자 혜윤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빠르게 매대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인가 뒤적이는 소리를 내더니 무지의 종이 백에 쿠키를 왕창 집어넣었다.


      “송 대리님이랑 나눠 드세요.”


      혜윤은 됐다는 남자의 앞에 쿠키를 내려놓고, 커피를 내리기 위해 등을 돌렸다. 남자가 웃으며 봉투를 들고 혜윤을 쳐다보았다.


      원두가 갈리는 동안 남자는 혜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태석은 그 모든 것들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서늘한 얼굴의 태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윤이 커피를 건네자 남자가 받아 들었다.


      “이런 거 말고, 우리 언제 저녁이나….”


      “이혜윤.”


      낮은 음성이 남자의 말을 잘라냈다. 태석이 남자의 옆에 서자 머리 하나가 넘게 차이가 났다. 옆으로 와서 서기만 했는데 위압감이 느껴졌다.


      “일을 하는 거야, 아니면 웃음을 파는 거야?”


      태석의 말에 남자도 혜윤도 얼굴이 구겨졌다.


      “이런 카페는 그런 식으로 장사하나?”


      태석은 매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냈다. 남자를 향해 위협적인 눈빛을 했다. 남자는 주춤하며 혜윤의 눈치를 보았다.


      “아… 대리님, 오늘은 제가 커피 서비스로 드릴게요. 와 주셔서 감사해요. 바쁘실 텐데 어서 가 보세요.”


      혜윤은 재빨리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카페에서 소란이 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카운터 앞에 서 있던 남자가 혜윤의 얼굴을 살폈다.


      “혜윤 씨, 괜찮아요?”


      “그럼요. 아는 분이에요.”


      혜윤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태석이 조소를 흘렸다. 남자는 마지못해 혜윤이 건넨 커피와 봉지를 들고 태석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가게를 나섰다.


      혜윤과 태석 둘만 남자 카페에 침묵이 흘렀다. 혜윤은 뻣뻣하게 서서 입술을 짓씹었다.


      “이혜윤, 우리가 아는 사이야? 붙어먹는 사이가 아니고?”


      혜윤이 태석을 쳐다보았다. 태석을 향한 눈동자에 힐난이 섞여 있었다. 태석은 혜윤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 쳐다본 것이 처음이라 조금 흥미로웠다.


      순한 얼굴로 화내는 건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더니, 제법 매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석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태석은 보란 듯이 혜윤을 응시했다. 마치 어떻게 하려는지 보려는 듯 여유롭게 혜윤의 분노를 받고 서 있었다.


      매서운 눈은 어느새 바닥을 향했고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싱거웠다.


      어떻게 저렇게 유약하고 비굴할 수 있는지 태석은 혜윤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태석은 매대를 두드려 혜윤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까보다 훨씬 힘이 빠진 눈이 태석을 향했다.


      “오늘은 가게를 일찍 닫아야 될 거 같은데.”


      혜윤은 당황한 얼굴로 태석을 쳐다보았다.


      “…오늘 늦게 열었는데.”


      “알아.”


      “…몇 시쯤 닫아요?”


      “지금.”


      태석이 제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지금 출발하면 일정에 크게 늦는 것도 아니니 딱 적당했다. 혜윤을 이곳에 혼자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너한테 하지만이 어디 있어?”


      혜윤에게 저런 새끼들이 얼마나 많을까 짐작해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태석의 말에 혜윤이 주먹을 쥐었다. 태석은 그런 혜윤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고 혜윤은 움직였다.


      지금 막 예열이 끝난 기계를 끄고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오픈 준비를 막 끝낸 카페는 정리를 해야 할 것도 없었다. 혜윤은 다시 태석의 차 조수석에 태워졌다.


      “내려.”


      태석이 본네트를 손으로 두드리자 혜윤은 그제야 문밖으로 발을 빼냈다. 태석은 혜윤이 제 옆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느린 걸음으로 옆에 올 때까지 태석은 그저 혜윤을 집요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싫은 티 적당히 내. 열 받을 거 같으니까.”


      제 옆에 선 혜윤의 손을 거칠게 낚아채 앞으로 걸었다. 작은 손이 잡힌 느낌이 말랑해 나쁘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빌딩 맨 꼭대기 층인 12층에 닿을 때까지 태석은 손을 놓지 않았다. 힘없는 혜윤의 작은 손 틈새에 자신의 굵은 손가락을 끼워 넣고 아까보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황 실장이 늦게 도착한 태석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다 옆에 서 있는 인영에 잠깐 멈칫했다. 태석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기 앉아있어.”


      태석은 혜윤의 손을 놓아주고 책상 맞은편에 있는 검은 가죽 소파를 가리켰다. 혜윤은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사무실에 들어온 항 실장은 혜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태석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물건은 부산항에 잘….”


      “가서 커피 한 잔 타 와.”


      태석이 말을 끊었다. 황 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적막한 사무실에서 혜윤은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 커다란 창문 너머로 맑은 하늘이 펼쳐지고 있었다. 혜윤은 맑은 하늘을 원망했다. 쏟아지는 햇살도 원망스러웠다.


      “이혜윤.”


      “네.”


      혜윤이 반사적으로 힘없이 대답하며 태석을 쳐다보았다.


      “커피 마시고 있어. 좀 지루할 테니까.”


      “네.”


      곧이어 믹스 커피를 탄 종이컵이 혜윤의 앞에 놓였다. 태석은 가만히 표정 없는 혜윤을 쳐다보다 아까 웃음 짓던 혜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석은 혜윤을 회사로 데리고 올 생각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카페에 혼자 둘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왜 자신이 그렇게 충동적이었을까. 혜윤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잠깐 고민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혜윤이 남들에게 아양을 떠는 게 보기 싫어서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한 시간 뒤에 회의가 있습니다.”


      황 실장이 태석에게 일정 브리핑을 마무리했다. 태석은 손을 휘휘 저으며 나가 보라고 했다. 한 시간 동안 처리해야 할 것들이 있었지만, 표정 없는 혜윤에게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다.


      커피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에 처연한 눈동자를 하고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새장 안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파랑새 같았다. 그것이 묘하게 심기에 거슬렸다.


      “이혜윤.”


      “네.”


      “싫은 티 작작 내랬지.”


      “네?”


      혜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태석의 시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흐르는 침묵이 태석을 계속 건드렸다. 차라리 저 두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거 같았다. 태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혜윤을 향해 다가가 턱을 아프게 잡았다. 눈물이 고인 눈이 태석을 응시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웃어 봐.”


      입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말이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태석이 말하면 혜윤은 해야 했다. 그게 태석과 혜윤의 사이에 흐르는 법칙이었다. 턱을 잡은 태석의 손등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왜 그 새끼한테는 아양 떨어놓고 나한텐 못하겠어?”


      손에 힘을 주자 혜윤은 아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태석의 이죽거림을 눈으로만 좇아가고 있었다. 잡힌 턱 주변이 새빨개졌다.


      혜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혜윤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울며 웃는 얼굴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제 말대로 했음에도 아까보다 더 기분이 나빠졌다. 태석은 사나운 눈으로 혜윤을 쳐다보았다.


      태석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태석의 등 뒤로 쾅 하는 큰 소리가 났다. 빈 사무실 안에서 혜윤이 어깨를 떨었다. 두려움에 잘게 떨리는 손이 진정되지 않았다. 눈물을 계속 닦아내도 젖은 뺨에 다시 눈물이 흘렀다.


      태석이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 회의를 준비하려 하나둘씩 모이던 직원들이 갑자기 바닥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태석과 오래 알고 지낸 경험상 저럴 땐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태석이 화가 난 표정으로 거칠게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직원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살벌하다, 살벌해.”


      황 실장에게 USB를 넘기던 상철이 고개를 저었다. 옆에 있던 석대가 닫힌 사무실에 눈짓을 하며 물었다.


      “저 안에 있는 여자, 그 여자지?”


      “아까 손잡고 올라왔다던데?”


      두영이 종이컵을 들고 모여 있는 사람들 곁으로 걸어왔다.


      “아까 봤어?”


      “언뜻.”


      “이뻐? 진짜 그냥 데리고 나올 정도로?”


      “형님 스타일 같기는 한데….”


      두영이 애매하게 대답하자 상철이 혀를 끌끌 찼다.


      “야, 내가 픽업하라고 민석이 보내거든? 근데 저번에 그 형님 따라다니던 신인배우? 걔 있잖아. 드라마 나오는 걔, 걔가 훨씬 낫대.”


      “아니 그럼 왜 한 달이나 작업한 걸 그냥 데리고 나왔지?”


      “그러니까. 형님이 원래 작업 일그러지는 거 제일 싫어하지 않냐?”


      “그러게…. 무슨 매력이 있어서.”


      “그냥 잘 안 보여서 이뻐 보인 거 아니야?”


      “그럼 이 대낮에 손잡고 올라왔겠냐?”


      상철과 석대, 두영은 사무실 안에 있는 혜윤이 궁금했다. 상철이 황 실장의 등을 툭툭 치며 혜윤에 대해 말해 보라고 부추겼다.


      “넌 봤을 거 아니야.”


      “봤지.”


      황 실장이 입을 달싹였다 다시 닫았다.


      “뭔데? 뭔데? 빨리 말해 봐. 뭔데.”


      “저 여자보다 형님이 좀….”


      “형님이 뭐?”


      “그냥 뭔가가.”


      “아, 진짜 뭐!”


      상철이 답답하다는 듯 짜증을 내며 사무실 안을 기웃거렸다. 사무실 창문 안으로 두상이 삐쭉 보였다.


      혜윤은 빈 사무실 소파에 앉아 깊은숨을 내쉬었다. 넓고 통 창이 크게 나 있는 방이었지만, 답답하게 느껴졌다. 멀미 나듯 속이 울렁거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혜윤에게로 향했다. 혜윤이 조금 멈칫한 사이 황 실장이 급하게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아… 그게.”


      혜윤이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라붙어 왔다. 부담스러웠다.


      “대표님께서 곧 돌아오실 겁니다.”


      태석이 온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약한 입술이 살짝 찢어져 혀끝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화장실에 가시는 거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혜윤은 태석의 존재도, 대놓고 저를 품평하듯 쳐다보는 눈들도 모두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좋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황 실장이 앞장서 걸었다.


      혜윤이 나가자 서로 눈을 맞췄다.


      “민석이 말이 맞네.”


      두영은 대놓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가슴이 큰 것도 아니고.”


      석대의 말에 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좀 당기셨던 건가?”


      황 실장의 책상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세 명은 서로의 머리를 맞대며 혜윤의 존재에 대해 품평했다.


      “형님도 인간인데 좀 당기는 날도 있겠지. 얻어걸린 거네.”


      “근데 왜 손잡고 들어오느냐고.”


      “내가 아냐, 네가 형님한테 물어볼래?”


      “근데 마르기만 해서 손에 쥘 가슴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가슴은 존나 밝혀.”


      상철이 가볍게 석대의 머리를 쳤다. 석대는 상철에게 주먹질을 하며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눴다. 점점 이야기가 천박하게 흘러갔다. 태석과 혜윤이 처음 만난 창고에선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혜윤이 어떤 몸을 가졌는지, 침대에서는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에 관한 저속한 이야기를 나눴다.


      말소리는 혜윤이 다시 사무실로 돌아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모욕적이었지만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을 참아내기 위해 깨문 입술에 붉은 피가 비쳤다. 울음을 참는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혜윤의 등 뒤로 문이 닫히자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사무실 문밖으로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이 혜윤을 한없이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혜윤은 견뎌내면 언젠가 끝이 날 것이라며 자신을 다독였지만,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왜 여기 서 있어?”


      태석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왜 울어?”


      혜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태석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왜 우냐고.”


      태석이 혜윤을 끌어다 소파에 앉히고 자신은 맞은편 탁자에 앉았다. 혜윤은 태석이 턱을 들어 올리려고 하자 고개를 돌리며 눈을 피했다. 태석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턱 아파?”


      우는 혜윤의 턱을 손바닥으로 슬슬 쓰다듬었다. 태석은 혜윤의 턱을 그렇게 세게 잡지도 않았다. 혜윤은 피부가 약해서 태석이 정말 아프게 잡았다면 얼굴에 멍이 들었을 것이다.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했음에도 태석은 가만히 우는 혜윤을 쳐다보았다.


      “말 안 할 거야?”


      왜 우는지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몇 번 다그치면 입을 열 것 같았지만 내키지 않았다. 아랫입술에 피가 맺혀 부어 있는 것을 보며 짧게 숨을 뱉었다.


      “네가 잘못한 거잖아. 왜 심술을 부려?”


      태석이 혜윤을 타박하며 유리 탁자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의 문을 열어 밖에다 고개를 내밀었다.


      “약국 가서 입술에 바를 약 좀 사 와.”


      태석이 지갑째로 책상에 던졌다. 앞에 있던 조직원들 눈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형님 거 너무 커서 찢어진 거 아닙니까?”


      석대가 슬그머니 농담을 꺼냈다.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직원들 사이에서 이 정도 농담은 그저 기분을 돋우기 위한 가벼운 일상적인 대화일 뿐이었다.


      태석이 표정 없는 얼굴로 짓궂게 웃고 있는 석대를 쳐다보았다.


      “왜, 너도 쟤 먹어 보고 싶어?”


      가벼운 대답이 나오자 사무실에 한층 더 큰 웃음소리가 울렸다. 사무실 안쪽에 있는 혜윤도 태석이 하는 말을 들었다. 혜윤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돌려먹자고?”


      태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석대가 어색하게 허허 웃음을 뱉으며 눈치를 봤다.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태석이 혜윤이 있는 안쪽 사무실 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아… 아… 그게….”


      석대가 말끝을 흐리자 태석이 석대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쟤가 마음에 들어?”


      “아니요. 아닙니다!”


      석대가 몸에 잔뜩 기합을 넣고 크게 대답했다. 태석의 주먹이 예고도 없이 배로 꽂혔다. 석대가 괴로운 기침을 뱉어내며 몸을 웅크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태석이 큰 손바닥을 들어 석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석대의 몸이 꼬꾸라져 바닥으로 쓰러지자 뒤이어 발길질이 날아왔다.


      “씨발, 이러니까 내 기분이 아까부터 좆같은 거 아니야.”


      몸을 둥글게 만 덩치를 축구공 차듯 발로 뻥뻥 차댔다.


      한참 발길질을 하던 태석이 거친 숨을 고르고 몸을 바르게 폈다. 격한 호흡으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직원들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태석은 크게 숨을 쉬며 감정들을 갈무리했다.


      “이거 치우고, 약국 갔다 와.”


      두영과 상철이 석대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질질 끌며 사무실 밖으로 황급히 나갔고, 황 실장은 태석의 지갑을 받아 든 채 뛰듯이 걸어 복도로 나왔다.


      우당탕 소리가 났다. 블라인드를 살짝 올려 밖을 바라본 혜윤은 겁에 질린 눈을 했다. 어느 때나 어느 곳이나 가릴 것 없이 폭력적인 남자였다.


      차라리 그때 살려 달라 구걸하지 않았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가정을 했다. 혜윤의 머릿속에 생기를 잃은 두 눈이 스쳐 지나갔다.


      돌고 돌아도 매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혜윤은 블라인드를 내리고 못 본 척 소파에 가만히 앉았다. 못 본 척은 할 수 있었으나 몸이 잘게 떨리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태석이 들어왔다. 혜윤은 침을 삼키고 눈을 바닥으로 내렸다. 태석은 집착이 가득한 번들거리는 눈으로 시근덕대는 숨을 고르며 혜윤을 쳐다보았다.


      태석은 혜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아까와 같이 맞은편 탁자에 앉아 연고를 짜냈다.


      새끼손가락에 연고를 짜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혜윤이 흠칫 놀라며 눈치를 보듯 태석의 얼굴을 보다 눈을 피했다.


      “이혜윤. 눈.”


      아직 감정이 다 갈무리되지 못한 태석의 음성에 혜윤은 시선을 빠르게 들어 올려 태석의 비위를 맞췄다.


      “너는, 내가 웃으랄 때 웃고, 울라고 할 때만 울어.”



      붉은 피가 묻은 셔츠 소매를 애써 외면하며 혜윤은 억지스러운 말에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 Maple Leaf Jun 29, 2025
      혜윤은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 도망칠 수 없으니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저 감내하는 것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혜윤은 애써 밝은 웃음을 지었다.


      “주문하시겠어요?”


      혜윤은 작은 카페를 하고 있었다. 2인용 테이블 8개가 꾸역꾸역 들어가는 카페는 혜윤이 이루어낸 혜윤의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혜윤은 카페를 사랑했다. 아직 대출금도 많이 남았고, 가끔은 힘들게 하는 손님도 있지만 견뎌낼 수 있었다.


      혜윤의 인생에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참아낼 수 있다면, 참아내는 게 괴롭지 않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카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들을 따뜻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혜윤에게는 꿈과도 같았다.


      커피를 시키고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하는 삶. 누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일지 몰라도 혜윤에게는 바라고 또 바라던 삶이었다.


      “감사합니다.”


      밖이 어둑해지고 마지막 손님이 나가자 혜윤은 행주를 들어 테이블을 닦았다. 마칠 준비를 다 끝낸 혜윤은 이제 집에 가는 일만 남았다.


      혜윤이 묶어 놓은 커튼을 풀어 정리를 하는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영업 끝났어요.”


      커튼을 정리하며 손님이 나가는 소리를 기다렸지만,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혜윤이 천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


      혜윤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작네.”


      태석이 그저 서서 두리번거릴 뿐인데 문을 막아선 듯한 위압감이 들었다.


      자신의 직업을 나타내는 검은 정장을 입고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쳐다보는 게 이질적이었다. 태석은 몇 번 두리번대다 호기심을 거두고 혜윤을 쳐다보았다.


      태석은 어울리지 않게 혜윤을 향해 싱긋 웃었다.


      “잘 지냈어?”


      혜윤은 아랫입술을 윗니로 짓이기며 덜덜 떨었다.


      “고개 들어야지.”


      태석이 한 손은 제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고 다른 손 검지로 혜윤의 턱을 들었다.


      “내가 네 앞에 있으면, 이렇게 고개를 숙이지 말고. 나를 쳐다봐.”


      혜윤이 천천히 눈을 들자 자신을 바라보는 집요한 눈과 마주했다. 혜윤은 짧게 숨을 마셨다.


      남자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혜윤의 뺨을 툭툭 쳤다. 혜윤은 모멸감을 느꼈지만 할 수 있는 게 고작 자신의 앞치마를 꽉 쥐는 것뿐이었다.


      “여긴… 어떻게….”


      “오면 안 돼? 내가 여길 뭐하러 왔는지 생각해 봐.”


      태석이 검지로 혜윤의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혜윤의 눈동자가 바닥을 향하자 태석의 입에서 쓰읍-소리를 내었다. 혜윤이 눈동자를 올려 태석을 바라보았다. 태석은 웃고 있었다.


      마치 애완동물을 쓰다듬듯 혜윤의 정수리에 손을 올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 잘 들어야지 착하지.”


      “…….”


      “여기도 나쁘지는 않겠네.”


      대답 없는 혜윤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석이 혼자 말했다.


      혜윤을 아래위로 훑은 태석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혜윤의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여기서는, 여기서는 안 돼요.”


      “뭐가 안 되는데?”


      “아, 아, 그, 그게, 그게….”


      혜윤이 고개를 밑으로 내리자 태석이 얼굴을 굳히고 큰 손으로 머리채를 잡았다. 크게 힘주어 잡는 게 아닌 것 같은데도 두피에 통증이 일었다. 혜윤이 두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겹쳐 잡았다.


      “내가 고개 내리지 말랬지.”


      “아, 아파요.”


      혜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엄살을 왜 부려?”


      태석은 불쌍한 것을 보는 얼굴을 했다.


      “마음 약해지게.”


      태석은 울먹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혜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았다. 머리채를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등을 굽혀 겁에 질린 혜윤의 두 눈과 마주했다. 태석은 그 두 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벗어. 아님 바지만 내리든지.”


      태석의 요구에 혜윤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으… 아, 안 돼요.”


      혜윤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태석이 두렵고 무서웠다. 혜윤의 눈동자가 태석의 눈을 지나 아래로 향했다.


      “눈.”


      혜윤이 태석의 말에 다시 태석의 눈을 쳐다보았다.


      “눈 봐야지. 사람이랑 이야기할 땐 눈을 보고 말해야지.”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알려 주는 체하는 태석이 혜윤의 젖은 눈가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뺨의 부드러움에 태석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혜윤의 볼을 주물렀다.


      “여기는… 제 카페예요.”


      “안 되는 것도 많고.”


      태석이 눈을 찌푸리자 혜윤의 눈에서 눈물이 더 빠르게 떨어졌다. 잔뜩 겁을 먹은 눈동자가 태석을 향하자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내가 여기서 안 하면 너는 나한테 뭐 해 줄래?”


      “시, 시키는 건 다 할게요.”


      재빠르게 대답을 하는 혜윤을 보며 태석이 웃었다.


      혜윤의 정수리에 손을 올리자 혜윤은 다시 태석이 머리채라도 잡을까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 혜윤의 행동 하나하나에 태석의 눈동자가 따라붙어 왔다. 태석이 혜윤을 빤히 내려다보다 등을 굽혀 혜윤의 이마를 깨물었다.


      “아!”


      태석이 혜윤의 이마에 남은 잇자국을 보며 웃었다.


      “엄살은.”


      낙인처럼 남겨진 잇자국을 엄지로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나와.”


      태석이 몸을 돌려 카페 밖으로 나가자 혜윤이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태석은 혜윤에게 살려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 결과였다.


      혜윤이 이를 악물었다.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혜윤은 몸을 일으켜 카페의 불을 끄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검은 외제차 한 대가 골목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뒷좌석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고 태석의 소리가 들렸다.


      “타.”


      혜윤이 차 앞에서 조금 망설이자 문이 툭 하고 열렸다.


      “문도 열어 달라고 시위하는 거야? 공주님 대접이라도 해 줘?”


      차에서 나온 팔이 혜윤을 사납게 끌어당겼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태석이 손이 혜윤의 머리채를 아프게 잡아 내렸다. 혜윤이 목에 힘을 주고 버티려고 했지만 고개는 너무나도 쉽게 태석의 손에 딸려 내려갔다.


      “뭘 해야 하는지는 알겠지?”


      혜윤의 뺨 한쪽에 태석의 허벅지가 닿았다. 태석은 손목을 틀어 혜윤의 얼굴을 사타구니에 가져다 붙였다.


      운전석에는 운전을 하는 기사가 있었고, 차는 달리고 있었다.


      “입 벌려.”


      낮고 서늘한 음성에 혜윤이 몸을 움츠렸다.


      “그럼 카페로 갈까? 문 활짝 열어놓고 너랑 나랑 떡 치는 걸 사람들이 보게 만드는 거야, 어때?”


      “흐윽.”


      “카페 대박 나겠네.”


      태석이 손에 힘을 주고 혜윤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혜윤이 아픔에 소리를 내며 울음을 뱉어냈다. 덜덜 떨리는 손이 태석의 허리춤으로 다가왔다. 태석은 그제야 혜윤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꽂았다.


      “한 번에 말 들으면 얼마나 좋아.”


      혜윤이 덜덜 떨며 지퍼를 열자 바지가 빠듯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 성기가 보였다. 혜윤이 두 손으로 잡아도 다 잡히지 않을 정도로 버거운 굵기였다. 검붉은 성기가 핏줄이 불거져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두렵기까지 했다.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뭉툭하고 굵은 귀두가 입꼬리 위에서 뭉근하게 비벼지다 입술에 닿았다. 입을 열고 귀두를 넣자 태석의 손이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세우지 말고.”


      태석이 말에 혜윤이 입을 오므렸다. 태석은 혜윤의 머리를 쳐다보다 이내 머리를 하나로 모아 손에 쥐었다. 그러자 혜윤의 얼굴이 드러났다. 태석은 그제야 만족한 듯 허리에서 힘을 풀고 혜윤이 자신의 성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감상했다.


      “봐 봐. 잘 먹으면서 엄살은.”


      혜윤의 머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던 태석이 혜윤의 머리채를 잡아 고정시키고 허리를 들썩였다.


      컥, 성기가 목구멍 안 깊숙이 찔러와 머리를 빼려고 했지만, 태석이 허용하지 않았다. 태석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허리를 움직였다. 태석은 혜윤의 입 안이 꽤 만족스러웠다.


      몇 번의 추삽질이 지나자 태석의 아랫배가 조여 들었다. 목구멍 깊숙이 넣어진 태석의 성기가 꿈틀거리며 사정했다. 혜윤이 캑캑거리며 고개를 빼자 태석이 혜윤의 턱을 잡았다.


      “삼켜.”


      태석의 명령에 혜윤이 정액을 삼켜보려 했지만 비릿한 맛에 헛구역질을 했다.


      “뱉어 봐. 아주 목구멍이 헐 정도로 쑤셔 줄 테니까.”


      태석이 혜윤의 코를 잡고 흔들자 혜윤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태석은 혜윤이 자신의 것을 삼키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았다.


      정액을 전부 삼켜낸 혜윤을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티슈를 몇 장 뽑아 엉망인 혜윤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이윽고 차가 멈춰 선 곳은 혜윤의 집 앞이었다. 혜윤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오늘은 들어가 봐.”


      태석의 말에 앞만 쳐다보던 혜윤의 고개가 태석의 쪽으로 돌아갔다.


      “왜, 아쉬워?”


      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태석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눈을 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며 머리채를 무자비하게 잡아내던 손을 혜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같이 올라갈래?”


      기가 막혔다. 태석은 마치 혜윤이 원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혜윤에게 태석의 말을 바로잡을 용기는 없었다.


      태석이 혜윤의 곁으로 다가오자 혜윤은 제 옷을 손에 꽉 쥐고 눈을 감았다. 혜윤의 뒤쪽으로 태석의 손이 넘어갔다.


      “내려.”


      혜윤은 눈을 떠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안 내리면 데리고 가고. 근데 많이 무서울 텐데?”


      태석의 말에 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뒤에서 태석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혜윤은 못 들은 척하고 문을 닫았다. 문을 닫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자신을 지나쳐 가는 차를 바라보며 혜윤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입 안이 텁텁하고 까끌거리는 게 이 일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


      창밖이 점점 어두워졌다. 밖을 바라보는 혜윤의 눈에 두려움이 담겼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두려움의 존재. 혜윤은 자신의 공간을 침범하고 잠식하는 태석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혜윤은 눈썹의 시작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잔잔한 일상에 던져진 돌의 파장이 혜윤을 짓눌렀다. 감정들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혜윤은 살아가기 위해 부정적인 감정들을 뒤편으로 미뤄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뒤집어썼다.


      덤덤하게 카페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제각기 할 일에 빠져 있었다. 혜윤은 그런 모습들을 보며 조금씩 긴장을 풀어 나갔다.


      엄마가 죽고 혜윤은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불우한 이야기처럼 혜윤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재에 도박과 술에 빠져 살았다. 집은 점점 작아졌고 처음에는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했던 친척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등을 돌렸다.


      어린 혜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아버지 하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떨어진다면 세상에 혼자 남는다. 혼자 남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아버지와 혜윤 단둘만 남은 세상은 불우하고 불안정했다. 어린 혜윤은 생각했다. 아버지가 없다면 얼마나 더 불우하고 불안정해질까.


      버려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아버지가 원하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 오라면 오고, 기다리라면 기다렸다.


      학교 다닐 기회를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도망 다니면서도 언젠가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살았다. 갑자기 아버지가 길거리에서 어이없이 죽어 버리기 전까지 그랬다.


      혜윤은 혼자 남겨진 뒤로 견딜 수 없는 외로움에 아버지를 따라 죽으려고 했지만 겁이 나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높은 건물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닥에 부딪혀 아플 것 같았고, 어두운 밤에 비친 밤바다를 보면 숨이 막혀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하다 이내 생각을 접었다.


      혜윤은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홀로 남겨진 불행을 꾸역꾸역 견디며 살아가다 보니 작은 희망들이 보였다.


      조금만 더 견디면 바라왔던 대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살다 보면 혜윤도 자신이 원하던 삶의 울타리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다.


      견디다 보면 또 괜찮아지겠지.


      혜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지금 혜윤에게 위로는 이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사람들의 말소리였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혜윤은 빈 커피 잔이 놓인 트레이를 받아 들었다. 컵을 싱크대에 넣고 정리를 하는 도중 옆에 놓은 핸드폰에서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 혜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핸드폰을 들고 큰 숨을 내쉬었다.


      - 왜 이제야 받아.


      혜윤이 대답을 망설였다. 마른침을 삼키고 작은 목소리를 냈다.


      “손님이 있어서, 전화가 온 걸 늦게 봤어요.”


      - 그래?


      태석은 탐탁지 않은 목소리를 했다. 눈앞에 없는데도 마치 앞에 있는 것처럼 온몸이 굳었다.


      - 차 보냈으니까 타고 와.


      태석의 말에 혜윤이 시계로 눈을 돌렸다. 아직 마감 시간이 두 시간이나 남았고, 곧 퇴근하며 들어올 손님들이 있었다.


      “…아직 마감 시간이 안 됐는데요.”


      당장은 갈 수 있지만 이런 일이 빈번해지면 어떡하지? 덜컥 겁부터 났다.


      - 그런데?


      “마감 시간 끝나고 가면….”


      - 혜윤아. 내가 직접 갈까?


      쥐어 짜낸 용기는 태석의 목소리 앞에서 바스러졌다.


      - 이혜윤. 내가 가?


      혜윤의 객기는 아주 작은 반응에도 사그라들었다.


      “…갈게요.”


      태석은 혜윤의 대답을 듣자마자 전화를 뚝 끊었다.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는 혜윤의 표정이 어두웠다.


      손님이 한 테이블밖에 남지 않아 다행이라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혜윤은 카페에서 주는 스탬프를 찍고, 진열장에서 쿠키와 케이크를 꺼내 포장했다.


      “저… 죄송한데 갑자기 급한 연락이 와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중에 오시면 지금 먹었던 음료 다시 해 드릴게요. 그리고 이거, 너무 죄송해서….”


      혜윤은 난처한 웃음을 매달고 포장된 케이크와 쿠키를 손님에게 건넸다. 한창 이야기 중이었던 손님들은 처음엔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을 이해해 줘서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손님을 떠나보냈다. 텅 빈 가게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테이블에 놓인 머그잔을 트레이에 담아 싱크대로 가져가자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큰 창을 통해 밖을 보자 검은 차가 골목을 막고 서 있었다.


      혜윤은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정리가 다 되지 않은 카페에 짧은 머리를 한 건장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얼굴에 써 붙인 듯 험상궂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혜윤을 보자 짧게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께서 모시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험상궂은 남자는 정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혜윤의 정리가 늘어지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혜윤은 남자가 주는 눈치에 정리를 다 마치지 못하고 불만 끈 채로 카페를 나섰다.


      혜윤은 차창 밖에 지나쳐 가는 가로등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떵떵거리고 살게 해 줄게.’


      혜윤은 헛웃음이 나왔다.


      내 팔자에, 자조 섞인 생각을 하며 꾸역꾸역 감정들을 집어삼켰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험상궂은 남자는 운전석에서 재빠르게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차 문을 열려고 했던 혜윤의 손이 갈 곳 없이 허공에 멈춰 섰다. 남자는 마지막까지 혜윤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혜윤에게 검은 카드키를 내밀었다.


      “맨 위층 스위트룸으로 가시면 됩니다.”


      최종 목적지를 직접 듣게 되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에 카드키의 뭉툭한 모서리가 느껴졌다.


      아무리 힘을 주어 잡아도 카드키는 구겨지지 않았다.


      차라리 구겨졌으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텐데.


      혜윤은 차 앞에서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호텔로 들어가기 위해 문 앞에 다가가자 직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혜윤은 반사적으로 작게 고개를 숙이고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로비에 떨어질 듯 붙어 있는 샹들리에가 시선을 빼앗았다. TV에서만 보았던 곳이었다. 유명인 누군가가 여기서 결혼을 하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다녀오면 자랑을 하듯 SNS에 글을 올리곤 했다.


      혜윤도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이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한번 자 봐야지 생각했었다.


      혜윤이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이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호텔 로비에 깨끗하게 느껴지는 정갈함과 로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화려한 모습에 혜윤은 가슴속이 답답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괜히 손을 만지작거렸다. 느린 걸음으로 호텔 안쪽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스위트룸 문 앞에 혜윤이 멈춰 서자 카드를 대지 않았는데도 벌컥 문이 열렸다.


      “아까 도착해 놓고 왜 이제 와?”


      “어….”


      혜윤이 대답하지 못했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왔음에도, 남자의 타박에 괜히 움츠러들었다.


      “됐어, 들어와.”


      태석이 혜윤의 팔을 잡고 끌었다. 혜윤이 힘에 당겨져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태석이 조급하게 입을 맞췄다. 놀란 혜윤이 입을 열지 않자 태석은 입을 벌리기 위해 아프게 턱을 잡았다. 벌어진 입 안에 거칠게 혀를 넣어 휘감았다.


      태석의 힘에 혜윤의 발걸음이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혜윤이 밀려 몸을 휘청대면 태석이 혜윤의 허리를 붙들어 중심을 잡았다. 거친 몸짓에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혜윤이 입술을 떼려고 몸을 뒤로 빼면 태석이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혀가 섞이는 질척한 소리가 들렸다. 한참이나 입술이 맞닿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질척이고 야릇한 소리가 섞이며 만들어내는 광경이 기이했다.


      등 뒤로 초인종이 울렸다. 태석이 입술을 떼자 혜윤의 입술 위로 빨간 자국이 남았다. 태석은 자신이 만든 흔적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들어가 있어.”


      태석이 턱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혜윤은 태석의 말에 눈에 보이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태석은 혜윤이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방 안에서 밖을 주시하고 있던 혜윤의 귀에 바퀴 소리가 들렸다. 유리에 무엇인가 부딪치는 소리들도 들렸다. 그리고 다시 바퀴가 카펫 위를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태석이 혜윤을 불렀다.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흐트러졌던 혜윤의 매무새가 어느새 멀끔해져 있었다. 태석이 먼저 소파에 앉았다. 태석이 앉은 소파 앞 탁자 위에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혜윤이 그 옆으로 다가갔다. 옆자리를 툭툭 치자 혜윤이 자리에 앉았다.


      “먹어.”


      혜윤은 먹고 싶지 않았다. 태석의 얼굴을 마주하고 음식을 먹을 강심장은 아니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태석이 빤히 쳐다보고 있어 마지못해 준비된 포크를 들었다. 음식 앞에서 방황하던 포크는 샐러드를 찍었다. 작은 양상추가 혜윤의 입으로 딸려 들어갔다. 태석이 음식을 느리게 씹는 혜윤을 쳐다보았다.


      태석은 혜윤을 보며 꼭 지같이 먹는다고 생각했다. 혜윤이 포크를 내려놓으려고 하자 태석이 한마디 거들었다.


      “더 먹어.”


      태석의 말에 혜윤의 포크가 다시 샐러드 볼로 향했다.


      “그거 가지고 힘이 나겠어?”


      태석은 제 앞에 있는 고기를 포크로 찍어 혜윤에게 내밀었다.


      혜윤은 당황한 얼굴로 태석의 주는 포크를 건네받고 살짝 내려놓았다. 그러다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태석은 해 보라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혜윤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꼬았다.


      “제가 마감 시간이….”


      태석은 한마디만 듣고 무슨 말을 할지 대충 감을 잡았다.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던 태석이 해 보라는 듯 혜윤을 계속 응시했다.


      “…그러니까… 마감 시간이 9시인데….”


      혜윤은 쉽사리 핵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말을 끌었다.


      “마감 끝나고 부르라고?”


      태석이 대신 말을 하자 혜윤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태석이 물음에 혜윤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키시는 건 뭐든지 할게요.”


      혜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오로지 이것뿐이었다. 태석은 혜윤의 대답을 비웃었다.


      “어차피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하지 않았나?”


      태석의 말이 맞았다. 혜윤은 태석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다.


      혜윤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고개를 내린 혜윤에게 태석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를 내었다.


      “고개.”


      태석의 말에 고개를 든 혜윤이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해답을 찾으려 애썼다.


      “…열심히 할게요.”


      태석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혜윤을 쳐다보았다.


      “뭐를?”


      “…….”


      혜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밑으로 내리깔았다. 태석이 손이 아프게 혜윤의 턱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눈.”


      혜윤이 아픔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눈동자를 들어 태석을 바라보았다. 아픔에 눈물이 가득 찬 눈을 보자 태석이 턱을 놓아주었다.


      “뭘 열심히 할 건데.”


      “…….”


      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점점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태석이 다시 손을 움직이자 혜윤이 다시 눈을 들어 태석을 바라보았다. 혜윤이 태석에게 내밀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섹스?”


      태석이 혜윤을 비웃으며 힐난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면서 뭘 열심히 하겠다는 건데.”


      “…….”


      눈물이 가득 고인 혜윤의 눈을 보며 태석은 혀를 찼다.


      “재롱을 떨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태석은 혜윤을 다그쳤다.


      “…세, 섹스 열심히 할게요.”


      태석이 혜윤을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섹스를 열심히 하겠다는 말이 웃겼다.


      “섹스를 열심히 한다고?”


      “…네.”


      “자신 있나 봐?”


      “네?”


      “기대해도 되겠어?”


      태석의 말에 혜윤이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석이 혜윤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혜윤은 자신에게 뻗어오는 손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태석은 거의 피가 터지기 직전의 입술을 혜윤의 이에서 꺼내며 대답했다.


      “열심히 해 봐. 내가 들어줄 수 있게.”


      태석은 혜윤이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둘 다 비슷한 말이니 상관없나?


      태석의 대답은 부정도 긍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혜윤의 눈에는 이미 허락이 떨어진 것처럼 희망이 어렸다.


      태석이 혜윤이 내려놓은 포크를 쳐다보았다. 아직 고기가 끼어진 채로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제부터 잔뜩 할 건데, 그거 가지고 되겠어?”


      태석의 말에 혜윤이 포크를 들어 입 안으로 가지고 갔다. 고기를 입에 넣고 말없이 우물우물 씹는 모습에서 비장함이 흘렀다. 태석은 그 모습이 재미있어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혜윤이 침대에 무릎을 세우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혜윤은 다리 사이에 꼿꼿하게 서 있는 성기 위로 조심스럽게 몸을 내렸다. 입구 주변에서 빗겨나가는 귀두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혜윤의 모습을 보며 태석의 눈가에 웃음이 어렸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어떤 재롱을 부릴까 궁금했는데,


      태석은 흥미로운 얼굴로 혜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선을 지나 깡마른 어깨를 눈으로 진득하게 훑고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가슴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희롱했다.


      혜윤이 중심을 잡기 위해 자연스럽게 태석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놓다 깜짝 놀라 손을 거뒀다.


      “이혜윤.”


      태석이 혜윤을 불렀다. 혜윤이 고개를 들어 태석을 쳐다보았다.


      “언제 넣을 건데.”


      태석은 괜히 타박하듯 말했다.


      “지, 지금이요.”


      혜윤이 급하게 몸을 내리자 빳빳하게 선 성기가 다시 입구 주변을 퉁 퉁겨져 나왔다.


      “오늘 안에 넣을 수 있겠어?”


      태석의 말에 혜윤의 눈썹을 늘어트렸다.


      “넣으려고 하는데, 그게….”


      울상을 짓는 표정에 태석이 허리를 조금 곧게 세웠다. 혜윤의 손을 포개어 잡고 제 성기를 움켜쥐었다. 혜윤의 손바닥에 성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잡고 넣어야지, 그렇게 허리만 내린다고 돼?”


      미끌거리는 액이 느껴지는 손바닥이 태석이 힘을 주는 대로 움직여 기둥을 한번 훑어 내렸다.


      혜윤이 성기를 잡자마자 급하게 몸을 내렸다.


      “윽…….”


      혜윤의 입에서 아픈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픔에 몸이 더 뻣뻣하게 굳어갔다. 태석이 혀를 찼다. 태석의 손가락이 배려 없이 혜윤의 음순을 열어젖혔다. 아직 젖지 않은 마른 구멍을 훑자 혜윤이 몸을 움츠렸다.


      “이러다 식어 버리면 그냥 카페를 닫으면 되는 건가?”


      태석이 성기를 뻣뻣하게 세운 채 뻔뻔하게 협박했다. 태석은 혜윤의 카페 같은 건 관심도 없었지만 혜윤의 반응은 재미있었다.


      “키스라도 해 보든지.”


      말이 끝나자마자 혜윤이 눈을 질끈 감고 말랑한 입술을 냅다 부딪쳤다. 태석의 눈에 눈을 감고 입술을 부딪쳐 온 혜윤의 얼굴이 보였다.


      키스도 제대로 못 할 줄 알았더니,


      말랑하고 작은 혀가 벌어진 입술 사이를 어설프게 할짝거렸다. 태석이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혜윤이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물리려고 하자 태석이 혜윤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입 안의 혀를 우악스럽게 얽혀왔다.


      태석은 눈을 감은 혜윤의 얼굴을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살짝 비틀어 부딪쳐온 입술 사이로 작은 숨이 새어 나왔다. 태석의 리듬을 맞추려 어설프고 뻣뻣한 몸짓이 이어졌다. 어색한 몸놀림에도 태석의 성기는 크기를 더더욱 키워갔다. 태석이 혜윤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아 제 몸쪽으로 당기자 혜윤이 휘청대며 태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태석이 혜윤의 음순을 벌려 안쪽을 느리게 비볐다. 혜윤의 다리가 흠칫 떨려왔다.


      태석이 혜윤의 다리를 더 벌려내며 입구 위로 성기를 가져다 댔다. 입구 주변에서 귀두가 느껴지자 혜윤이 태석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내려와.”


      태석이 두 손으로 혜윤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혜윤은 태석이 가르쳐 준 대로 성기를 잡고 그 위로 조심스럽게 앉았다. 태석이 잘했다는 듯이 귀두의 끝을 삼켜낸 혜윤의 목에 쪼듯 쪽쪽 입을 맞췄다.


      꽉 쥔 주먹보다 조금 작은 귀두를 삼켜내던 혜윤이 움직임을 멈췄다. 아프지 않을 정도에서 허리를 멈춘 혜윤이 고개를 들자 자신을 보고 있던 태석과 눈이 마주쳤다.


      허리를 잡은 손을 엉덩이 쪽으로 움직이자 혜윤의 몸이 경직됐다.


      “더.”


      “조금만, 흣, 기다려 주, 읏.”


      혜윤의 부탁이 끝나기도 전에 태석이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을 주어 혜윤을 끌어 내렸다.


      “움직여야지.”


      태석은 혜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흣!”


      혜윤은 몸 안으로 들어오는 태석의 성기가 버거웠다. 태석의 어깨를 쥔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잔뜩 주었다. 태석은 혜윤의 엄살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천천히 움직이던 혜윤은 성기가 반쯤 안으로 들어오자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태석은 섹스할 때 감질나게 구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데도 제 딴에는 열심히 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지금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아 혜윤이 하는 대로 적당히 놔두었다.


      태석이 목에 얼굴을 묻고 입을 맞추다 이를 드러내고 어깨를 물었다.


      “아!”


      혜윤의 한쪽 어깨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태석이 혜윤에게서 떨어지자 예쁘게 찍힌 잇자국이 보였다.


      “열심히 한다며.”


      태석이 혜윤의 엉덩이를 꽉 잡고 혜윤의 몸을 밑으로 잡아당겼다.


      “윽.”


      “더 열심히 했으면 하는데.”


      태석이 밑으로 잡아당기자 혜윤이 무의식중에 무릎에 힘을 잔뜩 주고 버텼다. 태석이 아까보다 더 세게 어깨를 깨물었다.


      “더 앉아야지. 누가 멈추랬어?”


      감질나는 놀이는 이쯤 했으면 됐다. 태석이 정말 힘을 주어 잡아 내리자 혜윤의 밑으로 반쯤 보였던 성기가 사라졌다.


      “아윽!”


      갑작스러운 삽입에 혜윤이 허리를 동그랗게 말며 몸을 떨었다.


      “움직여.”


      태석은 혜윤이 무엇을 하기도 전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움켜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읏, 윽.”


      혜윤의 엉덩이가 하얗게 될 때까지 꽉 잡아, 들어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읏, 하읏.”


      “이건 네가 열심히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는 거지.”


      웃음기가 배인 목소리로 타박을 하면서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읏, 잠깐, 잠, 하읏.”


      혜윤의 애원에 태석이 움직이던 팔을 잠깐 멈췄다.


      “키스해.”


      태석이 허리를 들어 깊게 찔러오자 혜윤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고개를 들어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말랑한 입술이 닿자 태석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태석과 혜윤의 몸이 서로 꽉 붙어 정신없이 움직였다.


      맞닿은 피부가 녹아내린다고 느껴질 정도로 뜨겁고 달콤했다. 태석이 몸을 돌려 혜윤을 침대에 눕혔다. 태석이 혜윤의 입술을 삼키며 힘없이 떨어진 혜윤의 두 손을 제 목 위로 두르고 혜윤의 등 뒤로 손을 넣어 깊숙이 끌어안아 온몸을 옭아매었다.


      “으으응… 하으.”


      혜윤의 꼬리뼈부터 짜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태석이 귀두만 남기고 성기를 빼내 다시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읏, 하아.”


      거친 추삽질이 이어졌다. 흉포한 허릿짓에 눈꼬리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 헐떡이며 짧은 숨을 연달아 내뱉었다. 혜윤의 척추에 기이한 감각이 꽃피며 태석의 목에 두른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태석의 허리 근육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눅진하게 풀린 속살이 성기를 쥐어짤 때마다 태석은 혜윤을 정신없이 몰아세웠다. 자신에게 매달린 혜윤에게 조금이라도 더 닿기 위해 입을 맞추고 내뱉는 작은 숨까지 모조리 집어삼켰다.


      “하으읏, 흐응, 하읏.”


      혜윤이 태석에게 매달린 채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태석을 끌어안은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세워 잡았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혜윤의 안에 성기를 박아대던 태석의 엉덩이에 보조개가 파이며 깊숙이 허리를 찔러 넣었다.


      혜윤의 안에서 하얀 정액이 새어 나왔다. 혜윤의 흉곽이 숨을 내쉬며 오르내렸다. 흥분에 젖은 근육들이 잘게 떨리며 여운을 남겼다.


      혜윤의 나른한 숨소리와 몽롱한 눈동자를 본 태석이 자세를 바꿔 부딪쳐오자 혜윤이 금세 당황한 얼굴을 했다.


      “열심히 한댔잖아, 그치?”


      태석은 모로 누워 혜윤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미끄러운 입구에 꿀렁이며 성기를 넣은 태석이 깊게 허리를 쳐올리자 혜윤이 아랫배에 힘을 주며 힘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태석의 입술이 혜윤의 목과 뺨 그리고 새겨진 잇자국에 내려앉았다.


      “으응, 응.”


      태석이 늘어진 혜윤의 고개를 억지로 돌려 저를 바라보게 했다.


      “혀 내밀어.”


      혜윤이 순순히 혀를 내밀었다. 태석이 혜윤의 혀를 집어삼켰다. 음란하고 축축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이어졌다. 태석이 음순을 벌려 바짝 오른 클리토리스를 비벼왔다. 혜윤의 몸이 파득파득 떨리며 몸을 움직이자 움직이지 못하게 상체를 잡고 리드미컬하게 클리토리스를 비벼왔다.


      “하악, 흐읏.”


      혜윤은 소리를 참아내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리를 참는 혜윤의 입술을 벌하듯 깨문 태석이 열린 입술 사이로 단단한 혀를 밀어 넣었다. 혜윤의 혀를 쪽쪽 빨아대다 입천장을 긁고 목구멍 안쪽까지 혀를 넣어 핥았다.


      아래위가 가득 찬 혜윤은 헐떡이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태석은 혜윤의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삼켜냈다.


      태석의 허릿짓은 멈추지 않았다. 집요하게 빨아댄 어깨와 목이 얼룩덜룩해져 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축축한 혀가 닿아올 때마다 따끔거렸다. 따끔거리는 피부가 기이한 흥분을 자아냈다.


      “하아… 으… 아윽.”


      태석은 이제 아예 혜윤의 위로 올라와 집요하게 혜윤을 쳐다보며 허릿짓을 했다. 접합부에서 하얀 거품이 일었다. 살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방 안을 울렸다. 혜윤이 몸을 격하게 떨며 두 번째 절정을 맞았다.


      태석이 혜윤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끌어안았다. 혜윤의 안을 꽉 채운 성기가 울컥 정액을 뱉어냈다.


      “하아….”


      혜윤은 긴 숨을 내뱉으며 축 늘어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갑작스레 덮쳐오는 깊은 수마에 혜윤이 태석을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카페….”


      숨소리가 섞인 작은 소리에 태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태석이 몸을 반쯤 일으키자 혜윤이 들어달라는 듯 침대를 짚고 있는 태석의 손을 제 손으로 살짝 덮었다.


      “마감이요.”


      태석은 혜윤이 덮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태석의 손이 큰 것인지 아니면 혜윤의 손이 작은 것인지 반도 다 가리지 못했다. 태석의 배 속에서 찌릿한 감정이 요동쳤다.


      혜윤은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한 채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태석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혜윤이 잡고 있는 손이 아닌 다른 쪽 손가락이 혜윤의 콧잔등을 건드렸다.


      “내가 열심이었던 거 같은데.”


      *


      혜윤이 감은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육통에 인상을 쓰고 침대로 다시 몸을 뉘었다.


      “아으.”


      허벅지 안쪽이 뻐근해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소리가 잘 나오지 않은 목을 한번 가다듬고 눈을 올려 천장을 바라봤다.


      확답을 받았었나? 어젯밤을 되짚어 보았지만 확답을 받은 기억은 없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열심히 하겠다고 객기를 부리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 진짜….”


      혜윤이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몸을 뒹굴었다.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카페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었던 게 분명했다.


      남자의 위에 매달려 있던 자신을 떠올리다 고개를 크게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밖으로 주변의 기척을 살폈지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을 봐서는 남자는 이미 이곳을 떠난 모양이었다.


      혜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협탁 위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혜윤이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픈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혜윤이 그냥 옷을 입고 뛰쳐나가려고 하다 제 아래로 흘러내리는 끈적끈적한 액체에 인상을 찌푸리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욕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울에 혜윤의 모습이 비쳤다. 그 자리에 멈춰서 파랗게 올라온 어깨의 멍을 보았다. 어젯밤 남자가 깨물었던 자리였다. 골반과 허벅지에는 남자의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엉망인 모습을 오랫동안 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샤워기에 물을 틀어 몸을 적셨다. 다리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정액을 물로 닦아내며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늦은 오픈 시간만 생각하기로 했다.


      다 말리지 못한 머리를 만지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누군가 혜윤의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어제 혜윤을 호텔로 데리고 왔던 험상궂은 남자였다.


      혜윤은 몸을 앞으로 걸어 나가며 눈동자로는 험상궂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걸음을 빨리했음에도 남자는 혜윤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가시는 곳까지 모시겠습니다.”


      혜윤이 자리에 멈춰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혜윤이 바로 자리를 뜨려는데 남자가 입에 꾹 힘을 주다 다시 말했다.


      “대표님께서 모시라고 했습니다.”


      혜윤은 남자가 화가 난 것 같아 눈치를 보았다. 혜윤이 주춤하자 남자는 입꼬리를 귀까지 올려 보였다.


      “대표님께서 가시는 곳까지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혜윤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남자는 그제야 앞장서서 걸었다. 혜윤은 남자의 등 뒤를 따라가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것도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
    3. Maple Leaf Jun 29, 2025
      “이번에 온 여자애 있잖아, 이름이 뭔지 알아?”

      거친 일을 하는 만큼 고아원에는 여자의 수보다 남자의 수가 훨씬 많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남자아이들의 입에서는 여자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여자의 생김새, 부위별로 품평을 하며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걔, 멍 든 애?”

      고아원에서 혜윤의 등장은 다른 사춘기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맞아 걔. 걔 이름이….”

      귓가에 닿는 소리에 태석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혜윤이래. 걔 첫날 봤냐? 존나 이쁘던데.”

      “이쁘면 뭐 하냐, 원장한테 처맞아서 얼굴이 시퍼런데.”

      “미친놈이냐, 멍은 빠지잖아. 이목구비를 봐야지.”

      혜윤이 없는 자리에서 혜윤의 품평이 이어졌다. 태석은 혜윤의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담에 주변의 친구들도 킬킬대며 추임새를 넣었다.

      “샤워장에서 걔 씻는 거 봤는데.”

      “너 그거 봤냐? 존나 왜 너만 보냐.”

      태석의 무리 사이에서 으레 나오는 이야기였음에도 귀에 거슬렸다.

      “그러니까 너도 저녁에 눈을 뜨고 있으라고, 미친놈아. 매일 처자면서.”

      “아. 씨발. 그래서 어떤데? 시발, 존나 꼴리냐?”

      모두의 시선이 영웅담처럼 이야기하는 남자아이에게 쏠렸다.

      “씨발, 가슴이 존나….”

      남자아이가 손으로 격정적이게 가슴을 주무르는 행동을 하자 서로가 눈을 맞추며 킬킬댔다.

      “김상문 이 새끼 변태새끼네~ 변태새끼야.”

      무리의 타박에도 상문은 성관계를 하는 듯한 행동을 하며 이상한 신음을 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걔 돌리면 안 되냐?”

      상문의 말에 태석이 얼굴을 굳히고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비틀었다.

      “아니 존나 개좋을 거 같다니까?”

      “원장이 가만있겠냐?”

      “원장한테 몇 대 맞으면 되지.”

      “한 대 맞고 질질 짤 새끼가 허세 쩌네.”

      “진짜 몇 대 맞는 거 감수해 볼 만하다니까? 존나 밑에 털도 별로 없고 젖꼭지도 분홍색이야.”

      “아, 씨발. 존나 꼴리는데?”

      무리 전체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혜윤을 돌리자고 말했던 상문이 태석을 향해 허락을 구하는 듯 쳐다보았다.

      “태석아, 우리 따먹을까? 어때?”

      상문의 물음에 태석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남자아이는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듯 몸을 방정맞게 흔들었다.

      “네가 먼저 먹고, 우리 주면 우리가 잘 돌려 먹을게.”

      태석이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느리게 비비며 남자아이를 쳐다보았다. 남자아이가 입을 꾹 다물고 입꼬리를 올려 태석을 쳐다보았다.

      “누가 나한테 명령하래?”

      태석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느리게 고개를 비틀면서도 살기 어린 눈빛이 상대에게 떠날 줄 몰랐다.

      태석의 흉흉한 얼굴에 상문이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어색하게 태석의 눈치를 보던 아이는 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순식간의 창고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뜬금없이 변덕을 부리는 태석의 모습에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태석을 제외한 아이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태석의 눈치를 보았다.

      “존나 거슬리네? 내가 네가 따먹으라면 따먹고 먹지 말라면 먹지 말아야 해?”

      “어? 아니, 그게….”

      태석의 억지스러운 말에도 남자아이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해명하려 입을 뻐끔거렸다.

      태석이 상문의 변명을 듣기도 전에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쳤다.





      태석이 뺨을 내려칠 때마다 상문의 몸이 비틀거리며 고개가 돌아갔다.

      “씨발, 누가 나한테 명령하래.”

      태석은 손에 점점 더 힘을 실었다. 계속되는 폭력에 상문의 뺨이 빨갛다 못해 보랏빛을 띠는데도 그 누구도 태석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흐윽, 잘못했어, 잘못했어. 태석아.”

      상문은 제 잘못도 모른 채 진심 없는 진심을 간절하게 빌었다. 고아원에서 태석의 말은 곧 법이었다. 태석은 이 작은 고아원의 왕이었고 태석의 변덕의 타깃이 된 아이들은 그것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문의 얼굴에 피가 터지자 태석이 그제야 내려치던 손을 멈추었다. 피 칠갑을 한 얼굴을 보았음에도 태석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 존나 짜증 나네.”

      태석은 쓰러진 상문을 발로 짓밟았다. 고통의 비명이 새어 나왔다.

      태석은 제 발밑에 짓밟히는 상문의 얼굴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섬뜩하리만큼 표정이 없는 얼굴로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며 자신의 기분이 왜 이렇게까지 좋지 않은지 생각해 보려고 했다.

      태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지워 버렸다.

      기분이 좆같으면 그냥 기분이 좆같은 거지.

      거의 정신을 잃은 듯 앓는소리만 간간이 내뱉는 상문을 뒤로한 채 창고 밖으로 나왔다. 창고 밖은 안에 소란이 일었냐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태석의 눈이 멀리 떨어져 벤치에 앉아 있는 혜윤을 향했다.

      “이…혜윤, 이혜윤.”

      눈을 혜윤에게 고정한 채 입 밖으로 나지막이 이름을 내뱉었다.

      “얼굴만큼이나 멍청한 이름이네.”

      고아원의 출입문은 혜윤이 들어온 낡고 칠이 벗겨진 대문 한 곳뿐이었다. 혜윤은 대문이 가장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듯 하염없이 문만 쳐다보았다.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인데도 혜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태석은 그런 혜윤을 보며 미련하다 생각했다.

      읽지도 않을 책을 펼쳐놓고 아닌 척 오고 가는 사람들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게 한심해 보였다.

      “개새끼 같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새끼.

      태석은 무늬만은 평온해 보이는 혜윤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안쪽에 태석이 잘 쓰지 않는 연고가 잡혔다. 손가락 끝에 닿아오는 연고가 거슬리기만 했다.

      주머니에서 연고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연고를 내려다보다 다시 혜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람에 부대끼는 혜윤의 머리카락과, 이마에서 코까지 내려오는 반듯한 선을 보며 태석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엇인가를 샅샅이 파헤치는 눈빛으로 오래도록 혜윤을 쳐다보았다.

      *

      태석은 무의식적으로 혜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흘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정신을 차려 보면 시선이 혜윤을 향했다.

      태석은 자신이 못마땅해 미간을 좁히고 다시 눈을 돌렸다. 이런 제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티를 내며 대문만 쳐다보는 혜윤이 짜증이 나다가도 또 벤치에서 잠깐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디 갔는지 궁금해 자꾸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아, 씨발.”

      태석은 제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된 것 같아 짜증이 치밀다가도 가슴께를 벅벅 긁고 싶은 충동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태석이 혜윤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려 대문을 열자 대문을 쳐다보던 혜윤과 눈이 마주쳤다.

      “뭘 봐.”

      태석과 눈이 마주친 혜윤이 금방 바닥으로 시선을 보냈음에도 태석은 퉁명스럽게 굴었다.

      문득 혜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석이 터벅터벅 걸어 혜윤의 앞에 섰다.

      바닥으로 내리깐 시선에 운동화 앞 코가 보이자 혜윤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울었는지 눈 밑이 조금 빨갰다.

      혜윤의 얼굴이 태석의 앞에 드러나자 태석은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듯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마주하던 시선이 사라지자 태석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안 와. 멍청하기는.”

      모진 말을 내뱉은 태석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는 혜윤의 동그란 정수리를 한참 내려다보다 불현듯 제 밑에서 흔들려 우는 혜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꼬리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면 혜윤의 눈가는 지금처럼 붉어질 것이다. 제게 매달려 오는 혜윤을 떠올리자 태석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태석은 그제야 혜윤이 왜 신경 쓰였는지 알 수 있었다.

      따먹고 싶다.

      태석이 제 감정을 찾아내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혜윤은 아무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 식당을 찾았다. 혜윤이 등장하자 모든 시선이 혜윤에게 꽂혀 들었다. 혜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식판을 들어 배식을 받았다.

      아무도 없는 빈 식탁에 홀로 앉아 느리게 숟가락을 들었다. 까끌까끌한 입 안에 들어가지 않는 밥을 모래 씹듯 씹어냈다. 혜윤이 숟가락질을 할 때마다 식당에 있는 모든 시선들이 혜윤을 향했다.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혜윤은 그러지 않았다. 혜윤은 이 자리에서 꼭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받아온 밥을 다 먹지도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

      혜윤이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들자 주변에서 마치 더럽다는 듯 헛구역질을 하거나 비난 섞인 소리를 냈다.

      “더럽게.”

      “얼마나 처했으면 벌써부터….”

      원장이 지나가는 혜윤을 볼 때마다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병이 있는 주제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어떡하냐, 닿는 사람들은 다 옮는 거 아니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주변의 아이들이 모두 혜윤의 병을 알게 되었다.

      혀를 차는 소리, 더럽다는 경멸의 눈빛, 그리고 혜윤을 향한 음담패설에 위축되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보란 듯이 약을 삼켰다.

      태석은 그런 혜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손을 보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겁도 많네.”

      혜윤은 원하는 것은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식당을 도망쳐 나와 벤치를 찾았다. 혜윤의 아버지는 약속한 일주일이 두 번이나 지났음에도 오지 않았다. 포기를 모르는 혜윤만 계속 벤치에 남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앉아 있을래?”

      태석의 심드렁한 물음에 잔뜩 경계하는 듯한 시선이 닿아왔다. 기다림에 지친 눈이 태석을 향해 원망을 드러냈다.

      “안 올 텐데.”

      자신을 쳐다보는 혜윤의 볼록하고 반듯한 이마를 한번 만져 보고 싶었다. 아니, 사실 이마 말고 혜윤의 어디든 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만지고 빨아대고 싶었다.

      음흉하고 음울한 생각을 알았는지 혜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태석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태석이 웃으며 혜윤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덩치가 큰 태석이 앉자 벤치가 잠깐 흔들렸다.

      “약 이제 거의 다 먹어가지 않나?”

      얼굴을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훔쳐보던 얼굴과는 또 다른 느낌에 태석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을 꾹 눌러 담았다.

      “영양제니까 괜찮나?”

      태석은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혜윤을 향해 짓궂은 물음을 내뱉었다.

      나는 알고 있어. 너의 비밀을, 그 쓸데없는 비밀을 마치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너의 그 믿음도.

      태석이 슬쩍 밀어 넣은 미끼를 혜윤이 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려 태석을 쳐다보다 이내 얼굴을 구겼다.

      태석의 눈가에 장난기 어린 웃음이 어렸다.

      “약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혜윤의 일그러진 미간을 꾹꾹 눌러 펴고 싶은 충동을 내리누른 채 태석은 제 손바닥에 닿는 벤치를 꽉 쥐었다.

      “무슨 상관인데요.”

      태석을 향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마치 노래처럼 들렸다.

      “제발 숨겨 달라고 빌어야 하지 않나? 지금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야?”

      생각보다 까칠한 혜윤의 반응에 태석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그 웃음을 알아본 혜윤이 얼굴을 더 일그러트렸다. 마른 눈가에 점점 물기가 어렸다.

      “허접한 사기극인데 그걸 믿다니.”

      태석은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혜윤을 계속 건드렸다. 조금만 더 한다면 혜윤의 눈가에 떨어지는 눈물을 직접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원장한테 내가 말하면 어떻게 될까?”

      은근한 협박에 혜윤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태석은 그 눈에 빠져들 듯 눈물 젖은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루 종일 쳐다만 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눈이 바닥으로 향하자 태석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혜윤은 어깨를 움츠렸다. 말하지 말라고 비는 것도 무서웠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금 이 순간도 무서웠다.

      “거짓말, 아니에요.”

      무서움을 비집고 나오는 억눌린 소리에 태석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 거짓말이 아니야?”

      믿어 주지 않는 평이한 음성에도 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망치듯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났다.

      “재밌네.”

      혜윤의 뒷모습을 보던 태석은 벤치에 몸을 늘어트리고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손바닥을 대고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

      혜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이름 모를 남자애가 혜윤의 비밀을 원장에게 이를까 매일이 살얼음판이었다.

      원장실에 불려간 그날 아버지가 쥐여 준 영양제의 의미를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불행에 혜윤은 이런 곳에 자신을 밀어 넣은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럼에도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꺼내 줄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매일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벤치에 앉아 대문을 바라봤다.

      “빨리 와라, 제발 빨리 와라.”

      혜윤은 불안한 두 손을 꽉 맞잡고 윗니로 아랫입술을 씹었다.

      고아원의 낮은 조용하고 한가했다.

      혜윤은 그제야 숨이라도 돌린 듯 긴 숨을 뱉어냈다.

      비닐 팩에 들어 있는 약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늘 아침에 약을 먹고 남은 약의 개수는 고작 다섯 알이었다.

      이 약을 다 먹고 나면 그다음에 혜윤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도망을 가면 영영 아버지와는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머문다면……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에 펼쳐지자 혜윤이 두 눈을 꾹 감았다.

      밀려오는 초조함에 코끝이 찡했다.

      이내 약이 떨어지기 전에 아버지가 올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혜윤이 비닐 팩을 구겨지게 잡고 두 눈을 뜨는데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눈동자를 위로 들어 올리니, 그 남자애였다.

      놀란 혜윤이 약을 꽉 쥐고는 숨기듯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섯 알?”

      고개를 비딱하게 숙인 채 얄밉게 말하는 남자애를 눈으로 흘겼다.

      장난을 그만 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용기는 없었다.

      혜윤도 이제는 이곳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고아원의 모든 아이들은 혜윤의 앞에 서 있는 이 남자애의 말을 들었다. 손짓 하나에 혜윤을 괴롭히며 배척했던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여러 번이나 목격했다.

      “그거 다 먹으면 이제 뭐라고 거짓말할 건데?”

      혜윤은 태석이 사람의 약점을 잡고 얄밉게 구는 모습을 보며 악질이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데리러, 올 거예요.”

      울고 싶지 않았는데도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태석은 피식 웃으면서 혜윤의 옆에 앉았다.

      혜윤은 아예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두 입을 꾹 다물고 두 손을 맞잡았다.

      “약 떨어지면 나를 찾아와.”

      태석의 말에 혜윤이 고개를 태석의 쪽으로 돌렸다. 눈에 맺혀 있던 마른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태석은 혜윤의 눈동자를 보며 입이 바싹 말라왔다. 집요하게 혜윤을 바라보던 태석이 헛기침을 했다.

      혜윤의 입가가 삐죽대며 바르르 떨려왔다.

      “갈 거예요, 집에.”

      태석이 혜윤을 보며 버겁게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크고 두툼한 손이 다가오자 혜윤이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곧 다가올 고통을 예상하고 이를 악물었다.

      눈을 질끈 감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아무런 통증이 없자 혜윤이 웅크렸던 몸을 살짝 펴고 실눈을 뜬 채 큰 손이 다가왔던 곳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눈앞에 태석의 손이 보였다. 혜윤이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자 뺨에 뜨겁고 두툼한 손이 닿아왔다.

      혜윤의 뺨을 모두 감쌀 만큼 큰 손이 얼굴을 감싸자 혜윤이 이번에는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 끝에 태석의 손바닥이 닿은 상태로 눈이 마주쳤다.

      눈꼬리에 달려 있던 억울한 눈물이 태석의 손에 툭 하고 떨어졌다. 볼과 손 사이에 짭조름한 눈물이 끼어들었다.

      태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했다. 손에 감겨오는 뺨의 느낌이 흡족했다. 아니, 흡족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부족했다.

      배 속 저 깊은 곳부터 만족감이 차올랐다. 뺨을 만진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혜윤의 몸을 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아랫배에 피가 몰렸다.

      혜윤의 당황스러운 눈길이 태석에게 닿았다. 태석은 궁금했다.

      손에 닿는 거만으로도 생각을 전할 수 있을까? 자신의 꿈에 나타나는 혜윤의 모습을 혜윤에게 보여 주면 어떨까? 지금처럼 눈물을 그렁거리며 울까? 아니면 눈을 흘기며 화를 낼까.

      태석은 숨을 고르려 흉곽을 크게 키웠다. 혜윤을 바라보는 눈에 검은 욕망이 깃들었다.

      혜윤은 태석의 눈에 깃든 욕망을 어떻게 알았는지 당황하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 마요.”

      무엇을 하지 말란 소리인지. 당황한 목소리에 태석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혜윤은 검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게 하얗고 순진했다. 그래서 더 갖고 싶은 걸 수도 있었다.

      “나를 찾게 될 거야.”

      일단 가져 보고 나면 이 갈증이 나는 감정들도 모조리 해소할 수 있겠지.

      태석이 미련 없이 일어났다. 고작 남은 알약 5개를 손에 쥐고 있는 꼴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혜윤의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올라가는 두 입꼬리를 내려 표정을 갈무리했다.

      손에 닿은 뺨의 감촉을 계속 되새기며.

      빨리 갖고 싶다. 제 것을 물리고 뼈를 발라 먹듯 입 안에 넣어 발라 먹고 싶다.

      태석은 혜윤의 뺨이 닿았던 손을 주먹 쥐며 남아 있는 온기를 꾸역꾸역 손안에 넣었다.

      *

      혜윤의 손바닥 안에 한 알의 약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혜윤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기만 했다.

      어떻게든 다시 희망을 붙여 보려고 해도 산산조각이 나 더 이상 붙여질 희망도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매일 밤 영양제를 약이라고 속였다며 원장이 쫓아오는 꿈을 꿨다.

      혜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여기서 조용히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생각하다가도 몇 알 남지 않은 약을 볼 때마다 첫날의 원장이 떠올렸다.

      하얀 메리야스를 입은 배불뚝이의 탐욕이 등 뒤에 소름이 돋게 만들기 충분했다.

      “진짜 걱정도 안 되나….”

      혜윤은 마음을 접으려고 하다가도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런 곳에 던져두고 어디선가 도박이나 하고 있을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이곳에서 도망을 나가면 앞으로 평생 아버지의 소식은 듣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코끝이 찡하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들이 반복되었다.

      혜윤은 아버지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덜컥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코끝이 찡하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어떡해, 진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버려졌다는 게 실감이 난다.

      혜윤은 절망과 불안이 담긴 눈으로 여전히 대문 쪽을 쳐다보았다.

      제발.

      제발.

      두 손을 꽉 잡고 믿지도 않은 신에게 몇 번이나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혜윤의 기나긴 간절한 기도가 끝이 나도 현실은 그대로였다. 고요하고 절망적이며 허무한 시간들이 지나간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혜윤은 한숨을 쉬었다.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불안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짓이긴 입술이 너덜너덜해졌다.

      점점 싸늘해지는 공기에 손바닥으로 팔을 쓸면서도 희망을 잃었다던 혜윤은 여전히 그 낡고 칠이 벗겨진 대문을 쳐다보았다.

      *

      태석이 고아원의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둠이 깔린 고요한 새벽, 태석은 고양된 얼굴로 두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태석의 옷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핏자국들이 묻어 있었다. 태석은 제 주머니 안에서 칼을 꺼내 손잡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쥐고 펴기를 반복했다.

      태석의 눈에 혜윤이 매번 앉아 있는 벤치가 보였다. 태석은 오늘만을 기다렸다. 혜윤의 장단도 맞춰 줄 만큼 맞춰 주었고, 걸림돌도 모두 해치웠다.

      며칠째 세고만 있던 날이 다가오자 태석은 흉곽을 키워 차가운 새벽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어차피 성인이 되고 나선 언젠가는 하게 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작은 여자아이 하나 때문에 이렇게 이르게 칼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원장을 처리하기 위해 준비했던 나날들을 돌아보며 태석은 혜윤이 앉아 있는 벤치로 걸어갔다.

      태석이 원장의 목에 칼날을 박아 넣었던 그 순간 머릿속엔 온통 혜윤의 생각뿐이었다.

      벤치에 앉아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혜윤이 앉아 있는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느슨해졌다.

      태석은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대충 옷에 닦아내고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흥분에 잔뜩 성이 난 성기를 끄집어냈다. 욕망에 사로잡힌 눈동자를 조금 느리게 감았다.

      손바닥에 닿았던 뺨의 감촉을 생각하며 두꺼운 성기를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새벽의 찬 기운 사이로 태석의 뜨거운 숨이 섞였다.

      태석은 점심이 지나 멀끔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아이들은 태석이 지나갈 때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등 뒤에서 수군댔다.

      태석이 식당으로 들어가 밥 먹는 아이들 사이로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눈에 담은 이들 중에 찾는 사람은 없었다. 태석이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이혜윤 어디 갔어?”

      혹시 무서워 방에 이불이라도 뒤집어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혜윤과 방을 같이 쓰는 여자애에게 물었다.

      “이혜윤 어디 있어? 방에?”

      “그게… 어제 어떤 아저씨가 와서 데리고 갔어.”

      태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서늘한 얼굴에 여자아이가 주춤하며 애써 자신을 변명했다.

      “못 가게 하려고 했었는데, 그 아저씨가 이혜윤하고 짐 들고 가 버렸어.”

      태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혀로 제 뺨 안쪽을 쓸어 올렸다.

      김이 샜다.

      허무했다. 귀여워서 장단을 좀 맞춰 줬더니 이런 식으로 도망을 가다니.

      태석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먼저 가졌어야 했는데,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혜윤은 이미 멀리멀리 도망을 쳤다.

      태석의 얼굴이 움찔거리고 시원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온몸을 떨어가며 몸을 굽히고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자신이 한심하고 상황이 좆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한심하다, 이태석.

      태석은 모든 웃음을 털어내고 다시 얼굴을 굳혔다.

      어쩔 수 없지. 이미 가 버린 거.

      태석은 뒤를 돌아 식당을 빠져나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는 길, 눈에 들어오는 벤치를 보며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았다.

      “야.”

      “응?”

      “저거 없애.”

      *

      혜윤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앞의 새하얀 침대를 보며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을 이어 붙였다.

      멀미가 날 것 같은 따뜻한 공기와 가시방석처럼 불편한 고급 가죽시트의 촉감을 떠올리며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코트에 둘둘 싸인 혜윤이 멍하니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샤워해도 될까요?”

      혜윤의 말에 태석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태석은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먼지가 가득 묻은 혜윤을 보며 손끝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혜윤이 도망치듯 욕실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큰 거울이 보였다. 혜윤은 멈칫 몸을 굳히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탁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을 걸어 잠갔다.

      먼지가 묻어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은 얼굴과 여기저기 뜯어져 있는 옷, 헝클어져 있는 머리 모두 낯설기만 했다. 혜윤은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입술을 물었다.

      “살았으면 됐지.”

      혜윤은 제 앞에서 죽어간 사람을 떠올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살인자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두려웠다. 두려움에 잘게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코트를 벗어 얌전하게 개었다. 혹여 자신의 코트가 상했다고 목을 조르기라도 한다면, 혜윤은 나쁜 상상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 따뜻한 물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넣었다. 일회용 비누의 비닐을 까 손에 넣고 비볐다. 거품이 일며 검은 구정물이 세면대 하수구로 빠져나갔다. 자신도 이 구정물처럼 홀연히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욕실 밖으로 나가면 벌어질 상황에 숨이 턱 막혔다.

      혜윤이 최대한 시간을 벌며 욕실 밖으로 나오자 침대 모서리에 앉아 욕실을 쳐다보던 태석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다가왔다.

      위협적인 얼굴에 마른침을 삼켰다.

      태석이 혜윤을 향해 손을 뻗자 혜윤이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태석이 혜윤의 턱을 아프게 잡았다. 벌어진 입 안으로 축축한 혀를 밀어 넣었다. 신경질적인 얼굴이 그제야 조금 느슨해졌다.

      태석은 키스를 하며 눈을 질끈 감은 혜윤을 감상하듯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태석의 혀가 혀뿌리를 뽑을 듯이 강하게 옭아맸다. 혜윤의 말랑한 입 안을 자신의 것처럼 구석구석 헤집었다.

      혜윤이 거친 키스에 몸을 휘청거렸다. 태석이 움직이지 못하게 허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만족스럽다는 듯이 몇 번이고 훑어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유두를 끼워 넣고 비틀었다.

      “아….”

      어느새 혜윤을 침대에 눕혀 혀로 장난치듯 유두를 건드리다 빨아대기를 반복했다.

      혜윤은 자신의 가슴을 핥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두껍고 축축한 혀가 가슴 위에서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고개를 든 태석의 정염이 짙은 눈과 마주치자 태석은 보란 듯이 혀를 더 길게 꺼내 가슴을 느리게 핥았다. 혜윤이 민망함에 눈을 돌렸다. 태석이 아프지 않게 가슴을 깨물었다.

      농도 짙은 혀 놀림에 몸을 바스락거리자 태석이 혜윤의 몸에 빈틈없이 붙어왔다.

      “하….”

      태석의 혀가 배꼽 주위를 배회하자 혜윤의 몸이 비틀렸다. 태석은 자신의 큰 몸을 이용하여 혜윤을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하고 집요하게 혀로 지분대었다.

      “하으….”

      촉촉하게 젖어오는 입구에 태석의 등 뒤로 만족감과 기대감이 삐죽 솟아올랐다.

      달았다. 혀끝에 닿아오는 혜윤의 피부가 달콤했다.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태석이 고개를 내려 혜윤의 음부에 코를 바짝 붙여왔다. 뜨겁고 긴 혀를 꺼내 한 번에 아래위로 훑자 혜윤이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안 돼요.”

      혜윤이 허우적대자 태석이 두 손목을 잡아 고정했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맛을 음미하듯 느리게 움직였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돌기를 혀로 지그시 내리눌렀다.

      “헉.”

      혜윤의 허리가 튕겨 올라가며 억눌린 소리가 목에서 울렸다.

      “하으… 제발….”

      혜윤의 애원에 태석의 입술이 더 짓궂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두꺼운 혀를 뾰족하게 세워 길게 핥아대다 어느새 완연히 모습을 드러낸 클리토리스에 집중했다.

      “아흣!”

      혜윤이 자신의 소리에 놀라 입술을 짓씹었다.

      “소리 내.”

      태석은 신음을 참는 혜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를 세워 클리토리스를 자근자근 물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감각에 몸을 굳자 부드러운 혀가 클리토리스 위를 핥았다. 상반되는 감각에 혜윤이 다리만 발발 떨었다.

      “하으…”

      감당되지 않는 감각을 저지하려 힘없는 손으로 태석의 머리를 밀어내자 태석은 더 짓궂게 이를 드러내어 클리토리스를 긁어댔다. 생경한 감각에 혜윤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리만 바스락거렸다.

      같잖았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밀어내려는 유약한 손놀림은 태석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 뿐이었다.

      혀를 평평하게 펴 중심부를 핥아대다 바짝 올라온 돌기를 입에 넣고 빨아들였다.

      “아… 아….”

      혜윤의 반응에 맞춰 조금 더 외설스럽게 얼굴을 비비며 애액을 빨아댔다. 단단한 혀가 질구를 가르고 작은 구멍으로 파고들었다.

      혜윤이 허리를 튕기며 생리적인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붉게 달아오른 음부에서 입술을 떼어내고 고개만 돌려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그만… 흐응….”

      “위아래가 하는 말이 서로 다른 거 같은데.”

      태석이 검지를 입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혜윤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태석은 그 모습을 보며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혜윤의 입구가 쉽게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태석은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손을 움직이며 달뜬 혜윤의 얼굴을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흥분에 겨워 헐떡이는 얼굴을 보며 손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혜윤이 허리를 튕겨 올렸다. 몸을 부르르 떨며 흥분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태석은 더 빠르게 움직이며 엄지로 클리토리스를 짓이기자 혜윤이 숨을 들이마셨다.

      “헉.”

      질척한 소리를 내는 음부에 머리를 박고 클리토리스를 입 안에 넣어 빨아올렸다. 태석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혜윤의 다리가 발발 떨렸다.

      “읏!”

      혜윤의 아랫배에 힘이 잔뜩 들어가며 태석의 손짓에 맞춰 엉덩이를 들썩였다. 태석이 손가락을 빼내 애액이 가득 묻는 손목과 손바닥을 핥으며 흥분에 젖은 혜윤을 내려다보았다. 태석의 눈 밑에 웃음이 어렸다.

      태석은 꺼덕거리는 제 성기를 손으로 한번 훑고는 혜윤의 입구의 맞춰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박아 넣었다. 묵직하고 둔탁한 삽입감에 혜윤의 입에서 숨이 터져 나왔다.

      태석은 그대로 혜윤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거칠게 허릿짓을 했다.

      “아흑, 윽, 흐, 윽.”

      거친 태석의 몸짓에 입에서 다 내쉬지 못한 숨이 터져 나왔다. 목 밖으로 성기가 뚫고 나올 것 같이 거칠어서 무서웠다.

      울고 싶지 않아도 눈꼬리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태석은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눈물을 핥고 이마와 코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하아… 하아….”

      태석의 손이 유륜을 긁어대며 혜윤의 목에 입술을 비볐다. 살이 부딪칠 때마다 음란한 소리를 냈다.

      푹 박혀 든 성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진저리치면 다시 안쪽으로 파고들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적이고 선정적인 쾌감에 혜윤이 고개를 내리 저었다.

      어느새 남자의 크기에 맞게 눅진해진 안쪽이 환영하듯 성기를 꽉꽉 물었다.

      태석이 혜윤의 허리를 잡아 뒤집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 위로 도망가려고 하자 태석이 두꺼운 손으로 골반을 내리눌렀다.

      맹수의 앞발이 등을 짓이기고 있는 듯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귓가에 경고 같은 그르렁 소리가 들렸다. 혜윤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벌리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결합부를 쓸었다.

      “더 들어갈 수 있겠는데?”

      태석이 혜윤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는 부위를 은근히 누르자 베개에 얼굴이 눌린 혜윤이 고개를 저었다.

      마치 손가락이 결합부를 누르며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잠깐, 잠깐만요.”

      혜윤이 다급하게 태석을 불렀다.

      두려웠다.

      결합부를 누르고 있는 손에서 벗어나려 앞으로 도망가자 남자의 손바닥이 혜윤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흐윽.”

      베개에 얼굴을 묻은 혜윤의 입가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벌겋게 달아오른 엉덩이와 우는 혜윤을 보며 묘하게 가학심이 든 남자는 픽 하고 웃어 버렸다.

      “안 돼요. 흑.”

      제 앞에 엎드려 울고 있는 혜윤의 척추를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왔다. 흥분의 여파가 남은 혜윤의 등 근육이 바르르 떨렸다.

      “무서워?”

      “네, 흡, 네, 무서워요.”

      “그래?”

      벌겋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큰 손바닥으로 느리게 쓰다듬었다. 우는 혜윤을 달래듯 뒷목에 입을 맞추고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까슬까슬한 음모가 엉덩이에 닿았다. 성기가 온몸을 꿰뚫고 짓눌렀다.

      태석의 기세에 혜윤의 자세가 무너졌다. 태석은 붉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꽉 쥐고 경고하듯 으르렁댔다.

      “버텨.”

      거센 허릿짓을 버티지 못하고 꼬꾸라졌다. 태석이 무너진 혜윤의 어깨를 잡아 올렸다.

      “흐윽.”

      성기에 꿰인 채로 들어 올려지자 혜윤은 두려움에 허우적댔다. 태석의 힘에 의해 침대에 닿았던 무릎까지 위로 뜨자 혜윤이 태석의 손에 매달리며 흐느꼈다.

      “무서, 흑, 워요.”

      태석이 혜윤의 어깨를 물었다. 잇자국을 혜윤의 어깨에 새기고 다시 혀를 내어 그 위를 축축하게 적셨다.

      “자꾸 엄살 피우네.”

      혜윤은 무의식적으로 계속 태석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도망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석이 성기를 더 깊고 뭉근하게 비벼왔다.

      “하읏.”

      태석이 팔로 혜윤의 온몸을 감쌌다. 허공에 무릎이 뜬 상태로 태석의 배와 혜윤의 등이 맞닿았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태석이 퍽퍽 엉덩이를 쳐올렸다. 엉덩이가 움푹 팰 만큼 강하고 깊게 밀어 넣으며 정신없이 혜윤의 안을 헤집었다.

      “하윽, 제발, 하읏… 하악.”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눈에 불이 반짝였다.

      태석이 손가락을 혜윤의 입 안에 넣고 허리를 움직이자 다물지 못하는 입에서 침방울이 떨어졌다. 침으로 범벅된 손가락이 혜윤의 클리토리스를 향했다.

      “잠깐만요, 잠깐만, 아니.”

      다급한 혜윤과는 달리 태석은 여유로웠다. 움직이는 몸을 힘으로 고정하고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비비자 흥분에 겨운 혜윤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몸을 바들바들 떨어대며 허릿짓에 힘없이 흔들리는 혜윤을 내려다보니 태석은 마치 자신이 혜윤을 잡아먹는 것 같았다.

      틀린 건 아니지.

      태석이 혜윤을 침대에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그사이 흥분에 도망치려 무의식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혜윤을 벌주듯 가슴을 꽉 쥐었다.

      혜윤의 입 안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혜윤을 꽉 안은 상태로 태석이 허리를 움직이며 클리토리스를 느리게 비벼 눌렀다.

      혜윤은 태석의 팔뚝에 손톱을 세웠다.

      팔뚝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이 태석을 더 흥분시켰다.

      제 몸에 닿아 있는 손을 떼어 깍지를 껴 침대에 고정시켰다.

      “잠깐… 잠깐만….”

      태석이 허리를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짓찧었다.

      “하악.”

      혜윤이 눈을 부릅뜨며 입이 벌어졌다. 태석은 때를 놓치지 않고 허리를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아아아! 아….”

      턱을 치켜든 혜윤이 비명을 질렀다. 엉덩이와 허리가 움찔거리며 태석을 감싸고 있던 질벽도 잘게 경련했다.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태석이 맛있다는 듯 게걸스럽게 핥아댔다.

      “아아… 아흣!”

      혜윤의 유두를 입 안에 넣고 천천히 굴리며 빠르게 쳐올리던 허릿짓을 느리게 멈추고 성기를 안으로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태석이 안에 사정했다. 축축한 액체가 혜윤의 안에서 흘러나왔다.

      태석의 성기가 빠져나오자 혜윤은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혜윤을 보며 태석이 웃었다. 만족스러운 입꼬리가 혜윤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진정되지 못한 숨소리가 따라붙었다.

      흥분이 채 가시지 못한 몸이 입술이 머무는 곳을 따라 근육을 우그러트리며 따라다녔다. 태석은 그 모양새가 재미있어 혀를 쭉 빼내 주변을 지분대었다.

      “흣.”

      근육이 꽉 찬 상체가 다시 혜윤의 위로 올라왔다. 힘없는 순한 눈과 마주치자 몸을 내려 이마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

      혜윤이 감은 눈을 느리게 떴을 땐,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선명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일어나려 몸을 움직이자 허리 아래가 욱신거렸다. 혜윤은 미간을 좁히고 팔로 몸을 지탱해 침대에 반쯤 일어나 앉았다.

      몸에서 떨어진 이불 사이로 혜윤의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얼마나 물고 빨렸는지 퉁퉁 부어 있는 가슴과 그 위로 울긋불긋한 흔적들이 보였다.

      살아남았다.

      혜윤이 안도감에 작게 흐느꼈다.

      그거면 됐다. 폭력과 살인의 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만 중요했다.

      “왜 아침부터 짜고 그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태석이 서 있었다. 문 위쪽에 머리가 닿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남자는 혜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가 징징대는 거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죄송해요.”

      혜윤이 바짝 얼어 제가 두른 이불을 손으로 꽉 잡았다. 태석이 손을 들어 가까이 다가오자 혜윤은 눈을 찔끔 감았다.

      “사, 살려 주세요.”

      “누가 너 죽인대?”

      태석이 혜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 넣었다. 태석의 손가락이 귀 뒤를 스치자 혜윤이 어깨를 웅크렸다.

      “쫄기는.”

      태석의 손가락이 유두를 스치자 혜윤이 몸을 뒤로 뺐다. 태석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유두 끝을 세게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아흑.”

      혜윤이 태석의 손을 따라 가슴을 내밀자 태석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손을 놔주었다.

      “네가 들어야 할 게 있어.”

      태석이 손을 놔주자 혜윤은 이불을 제 어깨 위로 끌어당기며 태석의 눈치를 보았다.

      태석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 전화를 받자 태석이 침대 위로 핸드폰을 던졌다.

      - 성찬열 그 새끼 잡았어?

      “아니.”

      혜윤은 찬열의 이름에 눈치를 보았고 태석은 계속 혜윤을 응시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 그 새끼 잡아다 준다며!

      “공손하게 말해야지.”

      - 형, 그거 아버지께서 아시면 난….

      “알았어. 잡아 준다니까.”

      태석은 여유로웠다. 혜윤은 빤히 쳐다보는 태석의 눈을 피해 눈알을 굴렸다.

      - 나 진짜 믿을 거 형밖에 없다. 이 대표. 진짜….

      “유태선. 그만.”

      - 아! 형!

      “아, 성찬열한테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태석이 제 손가락 끝으로 혜윤의 이마를 쓸었다. 혜윤이 두려움에 손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 그년 나 줘. 그년은 잡았지? 내가 아주.

      태석은 전화 속 인물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혜윤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혜윤의 몸이 두려움에 잔뜩 긴장해 있었다. 태석이 혜윤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 떨려왔다.

      “너한테 가져다주면 어떡할 건데?”

      - 어쩌기는 장기 한 짝씩 다 꺼내서 담가 버려야지.

      혜윤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어제 남자가 하던 짓을 봐서는 전화 속 인물의 이야기가 괜히 겁을 주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혜윤의 눈에서 뺨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태석은 전화기만 보며 울고 있는 혜윤의 턱을 들어 올렸다.

      혜윤의 고개가 힘없이 태석이 원하는 대로 들어 올려졌다.

      “고아야. 부모는 다 죽었고. 이제야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사는데 불쌍하지 않아?”

      - 불쌍? 아! 형! 왜 이래! 회장님한테 걸리면 재떨이로 맞는 내가 더 불쌍하지.

      태석은 눈물에 젖은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젖은 속눈썹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혜윤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어떡할래?”

      태석이 혜윤을 향해 물었다. 전화기 안에서는 어떡하긴 뭘 어떡하냐며 소리를 질렀지만 태석은 무시하며 혜윤을 바라봤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 살려? 뭐? 이 대표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어?

      “살려 주세요. 시키는 건 다 할게요.”

      제발 살려 달라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내가 징징거리는 거 싫다고 했잖아. 몇 번이나 말해야 해?”

      태석의 말에 혜윤이 울음을 참아내려 애썼다. 태석이 혜윤의 부은 눈을 신기하다는 듯 손가락 끝으로 누르며 울음을 참는 혜윤을 놀리듯 여기저기를 꾹꾹 눌렀다.

      손가락은 눈두덩이를 눌렀다가 뺨을 누르고 입가를 만지작댔다.

      “시키는 건 다 할 거야?”

      “네, 네. 시키는 건 다 할게요.”

      태석은 혜윤의 말이 흡족하다는 듯 얼굴이 느슨해졌다.

      “그래.”

      마치 선심을 쓰듯 혜윤의 머리를 쓰다듬은 태석이 전화를 들었다.

      - 형! 이 대표! 이태석! 야!

      태석이 가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 태석의 핸드폰에 다시 전화가 왔지만 태석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살려 줄게. 대신 시키는 건 뭐든지 해야 해.”

      “네. 네. 그렇게 할게요.”

      겁에 질린 울음이 목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자 혜윤은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럼 이제 울어도 돼.”

      태석은 선심을 쓰듯 혜윤을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태석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혜윤이 목 안에서 울음을 뱉어냈다.

      “흐윽, 흐으.”

      혜윤은 두려움에 미칠 것 같았다.

      남자를 당장이라도 밀쳐내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불을 꾹 잡으며 두려움을 목 밖으로 토해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맨등을 토닥이는 손바닥이 뜨거웠다.